서른 살이 되던 해, 결혼을 앞둔 친구들과 여행을 가기로 했다. 날짜와 나라가 정해지고 나는 자신만만하게 모든 스케줄을 짜겠노라 공언했다. 한참 화제가 되던 공정 여행, 착한 여행을 가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뭐냐”고 불안해하는 친구들에게 “일단 가보면 알게 된다”고, 다른 패키지나 에어텔 상품에 비해 1.5배도 넘게 비싼 가격도 다 이유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호언장담했다. 4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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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없는 삶에 대하여
냉장고가 없는 곳이 로도스라고? 몇 해 전, 어떤 이가 냉장고 없는 삶에 대해 쓴 글이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는 그 글에서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으며, “냉장고의 폐기, 혹은 냉장고 용량 축소! 여기가 바로 로도스”1) 라고 주장했다. 그 글은 수많은 욕을 먹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냉장고 없이 살라니, 그것이야말로 반자본적 실천이라니. 허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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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대중정치
해외의 이슈가 한국에서도 화제다. 미국의 트럼프 돌풍과 유럽의 브렉시트이다. 그만큼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국 대선이 한국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항상 있던 일이지만 트럼프가 일으키고 있는 바람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그의 태도나 성격부터 그가 내뱉는 언어까지, 도저히 대통령의 자질을 찾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에서 대선후보로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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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연구자의 몸을!
연구소에서 진행중인 세미나가 마지막 회차를 앞두고 있다. 이름하여 ‘문화연구 심화 세미나: 질적 연구방법론’. 현장연구를 위한 문화연구 세미나를 입문-심화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기획한 후, 작년 9월에 ‘문화연구 입문 세미나: 현장연구 편’이라는 입문 세미나를, 그리고 이번 4월에 심화 세미나를 진행했으니 대략 10개월 간 진행한 셈이다. 사후적으로 새롭게 이름을 붙여보자면 ‘연구자 몸 만들기 프로젝트’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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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그리고 권리장전
“벗! 침묵을 깨치라. 눈부신 광채를 뿌릴 벗의 붓이 미제와 군사 깡패들에게 내리치는 수백, 수천의 비수의 선봉이기를 나는 바란다. 조국은 이것을 바라고 또 명한다. 조국이 명하는 길에서 충실한 사람인 나의 벗이 그 붓으로 인민들로 하여금 이들을 쓸어버리게 하는 데 도움을 줄 글을 써야 한다. 남녘땅에서 모든 붓들이 창검의 숲이 되어 미제와 박정희 군사 깡패를 몰아내고 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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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그리고/혹은 한나 아렌트
본 졸고는 김규항 선생의 지난 2월 1일자 경향신문 칼럼(‘더러운 여자는 없다’)에 촉발되어 작성된 글이었다. 지난 구정 연휴를 즈음하여 경향신문 측에 투고하였으나 게재불가 답변을 받은 글이기도 하다. 적지 않은 시간차가 발생해 버렸지만 당시의 문제의식만큼은 여전하다는 판단 하에 발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소녀’상으로 단일화하는 태도는 위험하다고 말한 김규항 선생의 문제적 칼럼(‘더러운 여자는 없다’)을 읽었다. ‘소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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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이론 개조를 위한 프로젝트
탈대중, 소중, 오타쿠, 동물화, ‘신’문화산업, 플랫폼,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것들 1 요즘 연구소에서 운영위원들을 중심으로 세미나를 하고 있다. 제목은 소중 시대. 대강의 줄기는 이렇다. 이제 대중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소중들의 시대다. 이 말을 처음 접했던 건 어느 음악평론가의 글에서였다. 소녀시대의 <Gee>(2009) 이후로 국민가요라 일컬을 만한 압도적 음악이 나오지 않는 현상을 지적하면서, 대중문화에서 대중을 떼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