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gift) 경제와 집단기만

2016년 9월 27일culturalaction

우리는 누군가에게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할 때나 특별한 날, 상대방에게 선물(gift)을 준다. 그런데 선물 교환에는 일정한 행위 규칙들이 있다. 예를 들면 선물을 주기 전에 붙어 있는 가격표는 떼야 한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는 선물을 줌으로써 나중에 동일한 또는 보다 큰 가치의 선물을 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기대를 표현해서는 안된다. 또한 선물을 받는 사람은 선물이 얼마짜리인지 물어서는 안된다. 또 선물을 받는 즉시 그 자리에서 예상되는 선물의 가격에 상응하는 선물이나 돈을 답례로 주어서는 안되며, 혹시 답례를 하고 싶다면 선물을 받는 즉시가 아니라,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해야 한다. 왜 이와 같은 행위 규칙들이 존재하느냐 하면, 선물 교환의 증여경제는 시장교환의 경제와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러한 규칙들을 지키지 않고 선물을 주거나 받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이해관심에 무심한 순수한 선물 교환이 아니라, 이기적 목적에 따라 이루어지는 시장 행위자들의 상업적 거래 행위로 전락한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랑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주는 아름다운 행위는 순식간에 주판알 튕키면서 이루어지는 장사치들의 속된 거래 행위로, 선물은 상품의 지위로 떨어진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삶의 모든 구석구석들까지 파고들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장 논리 바깥의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호혜의 영역, 다시 말해 아무런 사심이나 욕심 없이 경제적 이익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작동하는 수평적인 인간 상호작용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자명성을 믿는다. 그리고 시장의 논리로부터 그러한 영역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일상적 행위 규칙들을 지켜간다. 확실히 선물 경제는 차갑고 세속적인 시장 경제에 비할 때 조건 없는 따뜻한 사랑과 휴머니즘으로 이루어진 유사 종교적 신성성과 도덕성의 우위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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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나눔카페. 기부코너(불광역)

언젠가 불광역에서 내려 서울시의 사회혁신센터 단지 방향의 출구로 걸어가다가 역사 내의 조그만 커피가게에서 커피 하나를 사마셨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2000원 이하의 싼 가격이었기에 신기해하면서 그 커피가게를 훑어보았다. 그 커피 가게는 ‘나눔 카페’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었다.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경제 또는 이른바 착한 경제 조직들의 활동을 홍보하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고, 매대 앞에는 유사한 내용의 팜플렛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나눔과 공감, 연대와 같은 따뜻한 가치들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문구들도 눈에 띄었다. 이곳저곳을 훑어보다가 결국 내 눈이 머문 곳은 카페 내부의 우측에 설치된 ‘기부코너’였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기부코너는 다단의 선반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선반들 위에는 간장, 고추장, 된장, 통조림, 밀가루, 캐첩, 햄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상품들이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기부코너인줄 모르고 햄이나 하나 사갈까 하여 점원에게 물었다.

 

“저기 있는 스팸 얼마예요?”

“저것들은 판매하는 상품이 아니라 기부물품입니다.”

“안 팔아요? 안 파는데 왜 파는 물건처럼 진열해놨어요?”

“……..”

별 생각 없이 던진 나의 질문에 점원은 잠시 자신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듯한 애매한 표정으로 우물우물하더니, 별 말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는 다시 좀 더 자세히 기부코너를 살펴봤다. 진열된 상품들 옆에는 “기부물품은 판매 및 교환행위 불가합니다”라는 문구가 큰 글씨로 씌여 있었고, 선반의 맨 위 상단에는 물건들을 기부한 기업체들의 이름들 역시 크게 붙어있었다. 그런 글귀들이 눈에 들어오자 뭔가 정리가 되는 듯했다. 진열되어 있던 상품들은 사실 상품이 아니라 일종의 선물이었고, 선물 증여자는 선반 상단에 이름이 크게 쓰여 있는 기업들이며, 수증자는 이른바 불우이웃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따뜻하고 신성한  선물경제의 스펙터클 앞에서 선물을 상품으로 착각하고 얼마냐고 물었다는 점을 떠올리니 순간 무슨 신성모독의 불경죄를 지은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무엇인가 기만당했다는 느낌에서 이런 질문도 떠올랐다.

“기부물품이라면 즉 팔 상품이 아니라면, 그리고 이해관심 없는 선한 마음에서 기부한 것이라면 누가 기부했는지를 왜 꼭 저렇게 전시해서 보여줘야 하지?”

“저 스펙터클은 누구의 시선을 겨냥한 것일까?”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잘 알고 있다. 저 기부코너의 기부물품들, 기부한 기업의 이름들을 전시해야 하는 이유는 그 기업들이 어려운 이웃의 고통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착한 기업임을 홍보해주어 기업 이미지를 높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저 스펙터클은 기부물품의 수증자들인 어려운 이웃들이 아니라 시장에서 자신들의 상품을 돈 주고 구매할 일반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고자 하는 것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저 기부코너에는 이미 시장 행위자들의 이해관심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샘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기부, 기업의 사회공헌활동, 나눔활동 등 넓게 볼 때 선물경제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대부분의 활동들이 이와 같은 형태로 이루어진다. 최소한 익명으로 이루어지는 기부, 사회공헌, 나눔활동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래 사진처럼 그와 같은 선한 행위를 하면서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명토 밖아 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니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바로 그와 같은 선한 행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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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와 같은 선한 행위를 하는 기업들이 궁극적으로 화폐 형태의 경제적 이익만을 노린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경제적 이익보다는 기업 브랜드 이미지 제고라는 목적을 겨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이익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의 선행이 이해관심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기부를 통해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고자 한다는 것은,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경제자본을 상징자본으로 전환하여 사회, 문화의 상징 영역에서 자신들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반적으로 궁극에는 확보된 상징자본은 다시 경제자본으로 재전환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부와 같은 선물경제가 이미 이해관심에 의해 깊게 관통되어 오염되어 있기에 순수한 의미의 선물경제 따위는 없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글도 그런 것을 폭로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사실 그런 것을 폭로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기부와 같은 선물 경제가 나름의 이해관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진의 기부코너에 이름을 올린 기업들도, 임대료 비싼 지하철역 안의 상당히 넓은 공간을 할애해 기부코너를 만들어 기부의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나눔카페도, 그것을 잘 알고 있고, 나눔카페 앞을 지나면서 기부코너의 스펙터클을 보게 되는 잠재적 일반 소비자들도 그것을 다 잘 알고 있다. 기업들의 기부가 무엇을 노리고 이루어지는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모두들 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두들 모르는 척하고 넘어간다.

사실 선물경제에 대한 논의의 원류이자 고전으로 통하는 마르셸 모스의 <증여론>에서 모스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선물경제의 독특한 역설을 지적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선물 주기는 이해관심과는 무관한 순수한 증여처럼 보이는 한에서만 선물을 받은 자로부터의 답증여라는 보상이 가능하다는 역설, 즉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한에서만 대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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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가 선물 경제의 적나라한 진실, 즉 순수한 선물 경제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그러한 진실에 대면하기를 회피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선물경제의 중앙에는 순수 증여의 부재라는 텅 빈 공백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해관심에서 자유로운 순수 증여가 존재한다는 믿음(신앙)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 텅 빈 공백을 덮는다. 마치 선물 경제에 텅 빈 공백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텅 빈 공백의 한 없이 깊고 깊은 무의미의 심연을 직시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글머리에서 언급했던 선물 경제의 행위 규칙들을 준수하는 유사 종교적 의례들을 실천하고, 그러한 실천들을 통해 텅 빈 공백이 원래 없었다는, 순수 증여는 존재한다는 믿음을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이 과정이 개인의 개별적 실천들 차원이 아니라 선물 경제를 통해 관계 맺는 사람들 사이의 집단적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집단적 기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알지만 서로 모르는 척 함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유지해가는 어떤 기만의 형태말이다. 그런 점에서 선물 경제는 보들레르가 말했던, 누구나 다 위조화폐인 줄 알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마치 진짜 화폐인 것처럼 사용함으로써 결국 진짜 화폐처럼 되어버린 위조화폐, 모두가 속음으로써 아무도 속지 않는 집단적 허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사회연구소 김주환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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