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종의 대중문화의 해체와 재구성]2014년 여름 한국 극장가에서 선전하는 프랑스 영화 두 편(45호)

2014년 8월 15일culturalaction

2014년 여름 한국 극장가에서 

 

선전하는 프랑스 영화 두 편

이윤종 / <문화/과학> 편집위원

yunjong_lee@naver.com

   2014년 8월 현재, 한국 극장가는 CJ와 롯데 등 대기업에서 제작, 배급해 대규모 예산과 과반수 이상의 극장 점유율을 내세운 바다 배경의 두 글자 제목의 한국영화들 (예: <명량>, <해적>, <해무>)에 선점된 상황이다. 이런 불리한 틈새에서 두 편의 프랑스 영화가 입소문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법 흥행하며 다양성 영화로서 상당히 선전하고 있다. 소피 마르소 주연의 <어떤 만남 (Une Recontre, 2013)>과 저 유명한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를 연상시키는 제목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Attlia Marcel, 2013)>이 그것이다. <어떤 만남>은 프랑스 영화라기보다는 미국 영화적인 빠른 편집과 푸른 빛깔의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로맨스 영화이고, <마담 프루스트>는 프랑스 철학과 문학, 정신분석학을 이론적, 서사적 씨실로, 초록빛과 노란 빛을 주된 톤으로 하는 서정적인 화면과 상상력이 넘실거리는 미장센을 형식적, 시각적 날실로 짠 성인을 위한 동화 같은 영화이다.
어떤 만남(Quantum Love, 2014)
  영어 제목이 <Quantum Love>인 <어떤 만남>은 불륜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프랑스 영화로서는 드물게 불타는 사랑에 빠졌음에도 불륜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애쓰는 두 중년 남녀의 애타는 몸부림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불륜으로 인해 서로의 인생이 복잡해질 것을 두려워하며 서로의 물리적 마주침을 “양자(quantum) 역학적 사랑”으로 생각하며 각자의 배우자나 애인과 함께 하는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새로이 사랑에 빠진 상대와의 만남과 마주침을 끊임없이 상상한다. 내 몸이 이 공간과 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양자역학적 발상을 로맨스와 연결시켜 로맨스 영화의 신선한 역발상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불륜을 막고자 고군분투한 감독의 과도한 순결주의가 신선하기 보다는 오히려 과도하다 못해 억지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 중년 로맨스 치고는 과하게 상큼발랄한 영상을 추구한 것도 약간은 부자연스러워 남녀 주인공의 상상적 로맨스가 불륜이 아님에도 결코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육체적 사랑이 아니라면 정신적 사랑은 불륜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한 감독의 역설적인 메시지는 비논리적이기도 하다. 분명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이 서로의 영혼에 동시에 흠뻑 빠져 있는데, 육체 관계가 없다고 해서 이를 불륜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 리자 아주엘로스라는 이 중년의 프랑스 여감독이 자신의 영화 속에서 추구한 것은 결국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의 프랑스판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양자(quantum)”와도 같은 <어떤 만남>의 가벼움은 <화양연화>의 은근한 무거움에 결코 견줄 수가 없는데, 이는 사랑이나 불륜에 대한 아주엘로스 감독의 진지한 고민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수십 년 동안 영화 속에서 사랑의 타이밍에 대해 성찰해 온 왕가위 감독을 영화 한 편으로 흉내 내는 것은 아마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또한 5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10대 시절의 전설적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소피 마르소의 초월적 매력은, 상대역으로 출연한, <언터처블: 1%의 우정>으로 한국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프랑스 국민 배우, 프랑소와 클루제를 평범하다 못해 평균 이하의 중년 남성으로 격하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어떤 만남>은 다양성 영화로서 성공하기는 힘든 요소를 갖추었음에도 소피 마르소의 이름값에 걸맞는 미모와 짧은 러닝타임으로 승부를 본 영화라고 볼 수 있겠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Attila Marcel, 2013)
 <어떤 만남>이 프랑스 영화에 미국식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과 왕가위적 감수성을 적용하고자 했다면,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은 프랑스 영화적인 문법에 충실한 기묘한 “힐링”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맨 첫 장면부터 마르셀 프루스트의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로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라는 문구를 인터타이틀로 깔며 시작한다. 시작부터 프루스트를 인용하더니, 영화 속에는 이 영화의 원제이자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한 <아틸라 마르셀>의 마르셀과 영화 속 등장인물인 마담 프루스트에 프루스트를 따다 붙이며 마르셀 프루스트에 오마주를 표한다. 또한 영화는 프루스트에 대한 오마주로서,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장편 소설 제목처럼, 유아 시절 양친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현장을 목격한 이래로 말과 행복을 잃어버린 남자가 행복한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다. 남자 주인공의 이웃인 마담 프루스트는 그의 독약과도 같은 헝클어진 기억 속에 자신의 실내 비밀정원에서 키운 약초로 만든 기억의 홍차를 통해 그가 잃어버린 행복한 기억들을 불러일으키고 차츰 차츰 찾아가도록 도와준다.
   이 기억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프루스트적일 뿐 아니라 프로이트적이며 라캉적이기도 하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그의 환자 중 한 명인 “늑대남(wolf man)”에 대한 분석에서 늑대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이 남성이 유아 시절 양친이 후배위 체위로 성교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를 아버지가 동물의 모습으로 어머니를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늑대를 무서워하기 시작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마담 프루스트>의 남자 주인공 폴도 유아 시절 양친을 동시에 잃었음에도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에 사무친 외로운 청년으로 등장한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아기인 폴에게 괴물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아버지를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청년이 된 폴이 양친이 함께 찍은 사진들 중에서 어머니 부분만 오려서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여주며 그의 아버지 혐오증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보여준다. 마담 프루스트의 차를 마시고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을 맞춰가던 중, 청년의 아버지에 대한 혐오도 프로이트의 늑대남처럼 양친의 후배위 성교 장면을 목격한 데서 기인한 것임이 이후에 밝혀진다. 그의 기억 속에서는 아버지가 언제나 어머니를 공격하고 폭행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 영아였던 자신도 괴롭히는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왜곡된 기억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폴의 아버지인 아틸라 마르셀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도 사랑하는 평범한 젊은이였던 것이다.
   또한 폴이 말을 잃은 것은 라캉이 말하는 “거울 단계(mirror stage)”에서 그가 사고로 양친을 한꺼번에 잃음으로서 언어가 지배하는 “상징계 (the Symbolic)”에 편입하지 못 했기 때문인 것도 이후에 밝혀진다. 라캉은 유아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거울을 보게 되면서 자신과 타자인 어머니를 구분하게 되고 이를 통해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인 “상상계 (the Imaginary)”에서 언어를 통한 “구별”의 세계인 상징계에 진입하게 된다고 보았다. 상징계는 언어화된 세계일 뿐 아니라 법과 도덕과 질서가 있는 세계인데 이는 “아버지의 이름 (the name of father)”이라는 언어적 질서로 체계화되어 있는 세계이다. 영화 속에서도 아직 유아인 폴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 거울을 보는 장면이 있는데, 거울을 보며 폴의 어머니는 폴에게 말을 시키고 폴도 거울 속 어머니를 보며 옹알이를 시작한다. 그러나 상징계에 진입해 말을 시작하려던 폴에게 남아 있던 왜곡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가 언어와 “아버지의 이름”을 모두 거부하도록 하여 그 스스로가 벙어리가 되는 길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폴의 모든 비극은 그의 왜곡된 기억 속 아버지의 폭력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집의 부실 확장 공사로 인해 이층에서 떨어진 피아노에 깔려 양친 모두가 한꺼번에 비명횡사한 것에서 시작됐음이 밝혀진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의 최대 미덕은 삼십대 중반에 접어들도록 상징계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부하고 살던 폴이 이제 와서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한다든가 하는 헐리우드적 해피엔딩에 대한 집착이나 정상성에 대한 비논리적 집착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아버지의 폭력성이라는 왜곡된 트라우마적 기억에 사로잡혀 살던 남자 주인공이 유아기로의 기억 속으로 잠깐씩 여행을 함으로써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아버지를 감싸 앉게 되는 아름답고 긍정적인 트라우마 이후의 삶을 예시하며 끝난다. 그러나 그 트라우마 이후의 삶은 강요된 정상성으로의 편입도 아니고 그를 키워준 이모들이 강조한 성공한 피아니스트로서의 삶도 아니다. 이모들이 강압적으로 가르친 피아노를 치며 행복하지 않았던 폴은 그 피아노가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흉이었음을 깨닫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마담 프루스트가 즐겨 연주하던 우쿨렐레의 전문 연주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마담 프루스트와의 만남은 폴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버린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결코 객관적이고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분기점임은 분명하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로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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