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석의 가르치다-배우다]공감 능력의 상실(45호)

2014년 8월 15일culturalaction

공감 능력의 상실

강정석(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장, 『문화/과학』 편집위원)

1. 필자는 현재 지식순환협동조합의 CM(커뮤니티/클래스 매니저) 그룹과 함께, 청년허브의 연구지원사업에서 「이행기 청년이 걸어갈 길」이라는 제목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이동’해야 하는 현재의 청년들을 ‘이행기’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며, 그들의 현재 하고 있는 생각들과 삶의 방식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고민들을 공유해보자는 취지로 시작된 연구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연구진은 특성화고 졸업 후 바로 취직했다가 퇴사하고, 다시금 의욕적으로 대학을 준비하는 한 청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월급을 모아 집의 생활비를 충당할 정도로 생활력이 강한 활기찬 청년이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현재 가장 중요한 사건인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그 청년은 세월호 참사는 너무 가슴아프고 안타깝지만, 현재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고 할 것도 많기 때문에,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고 대답했다. 노란 리본만 봐도, 뉴스에 세월호 관련 기사가 나와도 고개를 돌린다는 것이다.
2. 자신의 삶에 치여 살다보니 세월호 참사같은 사회적 부조리, 체계 깊숙이 자리 잡은 심각한 문제들에 일부러 공감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려 하는 것, 이것은 어쩌면 현재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 아닐까? 얼마 전 점심을 먹으러 간 순대국집에서도 옆 테이블에 앉은 4명의 중년 남성들이, 이번 7.30 재보궐선거에서 야당의 패배 이유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 남성들의 결론은, 이제 세월호 참사는 너무 지겹고 일반 국민들이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데,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를 질질 끌고 있다는 것이다. 난 그 말을 들은 순간, 인터뷰를 했던 그 청년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어쩌면 이들 남성들도 그 청년의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들의 대화 주제는 제주도 땅을 사는 중국인들로 옮겨져 있었다. 그들의 대화에서조차 세월호 참사는 하나의 입반찬에 불과했다. 앞서 인터뷰한 청년들과, 이 중년의 남성들은 아직 10명의 생명이 차가운 바다에서 나오지 못했음을 기억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3. 사토 요시유키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 수록된 푸코의 강연들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은 개개인을 ‘인적 자본화’시키는 주체화 과정이며, 이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 있어서의 기업’이 됨을 설명하고 있다.1)  인간 주체가 모두 기업이 된다는 것은 곧 개개인의 무한한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자기-경영적 주체’,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된다는 것이다.2)  이는 곧 무한경쟁 깊숙하게 개개인을 몰아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인터뷰한 청년은 아마 스스로를 ‘호모 이코노미쿠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면서, 스스로에 대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즉 고졸 후 바로 취직을 하여 회사 생활을 하면서 ‘고졸’이라는 스펙으로는 남들과 경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청년은 대입 시험을 준비하느라, 그리고 그 동안 등록금도 모으고 생활비도 버느라, 정말이지 세월호 참사에 공감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다. 그 사건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바쁘기 때문에’ 애써 잊으려 하는 것이다. 그 청년은 특성화고를 졸업하여 나름 괜찮은 직장생활을 했지만, 그 안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다시금 대학 진학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이렇게 개개인을 모두 경쟁의 굴레로 던져 넣을 수 있는 체계를 국가 단위에서부터 효율적으로 마련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4. 위에 언급한 청년은 정말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아마 앞서 언급한 중년의 남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필자 역시 이에 대하여 도덕적인 비난을 할 위치에 있지는 못하다. 아마도 어느 누구도 이러한 위치에 있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여전히 지배적인 한, ‘공감’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현재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플 뿐이다. 교육의 영역에 국한시켜 보자면, 1995년 5.31 교육개혁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은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교육주체를 ‘소비자’로 바꿔내며 개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고교 다양화 정책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는 곧 경쟁을 교육의 영역으로까지 주입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 것은 거대한 교육격차와 경쟁의 만성화이다. 경쟁이 최우선인 교육 현장에서 ‘공감’은 결코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욱 뛰어나게 공부를 잘해서 특성화고나 자율형 사립고에 입학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슬럼화된 일반고에서 꿈과 진로를 상실한 채 학교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잠재적 비진학’ 청소년이 될 뿐이다.3)
5. 세월호 참사에 이어, 최근 각각 28사단과 김해에서,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폭력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는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의 사회성’의 적나라한 실체와 마주해야 했고, 뒤이은 두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의 악마성’의 극단과 마주해야 했다. 사회적인 것의 위기와 개인적인 것의 위기는 어쩌면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재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정녕 상실해버린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따라 ‘백년지대계’라고 불리는 교육의 영역조차 경쟁적 체계가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버렸는데, 어찌 사회라고 다를 수 있으며, 개인이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가해자나 가해자의 주변 인물들이 조금이나마 피해자의 상처에 ‘공감’했다면, 정말이지 이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을 초래하지는 않았을는지 모르겠다. 물론 두 사건들의 경우는 매우 극단적인 것이긴 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극단의 가장자리에서 현재 사회의 숨겨진 본질이 잠깐이나마 드러나 버린 것은 아닐는지. 정말 이렇게 암담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상실해버린 ‘공감 능력’을 어떻게 하면 다시금 키워낼 수 있을까. 이는 앞으로의 교육이 반드시 짊어져야 할 핵심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1) 사토 요시유키, 김상운 옮김, 『신자유주의와 권력』, 후마니타스, 2014, 51.
2) 같은 책, 54
3) 엄기호 외, 「비진학 청소년 실태조사 연구」, 서울특별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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