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방]신유아를 만나다(45호)

2014년 8월 15일culturalaction

신유아를 만나다 

강효주 (mycrom13@naver.com)

열정이 넘치는 문화활동가

 김규항이 그랬다. 문화 활동가 신유아는 “삶을 위해 싸우는 농성과 그들을 돕는 예술 활동은 하나”임을 몸으로 체화한 사람이라고. 이 어려운 말을 몸으로 체화한, 현장에서 고군분투 하길 즐기는 활동가는 어떤 사람일까? 문화연대에 있다 보면, 신유아를 찾는 사람이 많다. 지난 2월부터 그는 1년 6개월의 긴 휴가를 받고 쉬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신유아를 찾으며 그의 부재를 아쉬워한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물으면 한결같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정적인 언니”, “파토스가 넘치는 사람”, “언제나 현장에서 일을 꾸미고 있는 사람”. 불혹의 나이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끊임없이 솟아나 현장에서 뛰는 걸 마다치 않는 이 여자 사람이 궁금해졌다.

문화연대에 들어오기까지 

 대학생 시절 신유아는 노래패였다. 전교조 1세대여서 고등학교 선생님들한테 영향받아 민중 가요를 처음 들었다. 그 노래가 어찌나 좋던지, 대학에 들어와서 다짜고짜 노래패에 들어갔다. 노래를 부르러 들어간 노래패에서 사회 모순을 알려줬다. 한국사회의 불의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갈수록 사회운동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에서 4년 살고 한국에 돌아온 뒤 사회운동이 하고 싶어졌다. 미술을 전공해서 그런지 문화예술분야도 관심이 있었다. 사회운동과 예술을 접목해 활동하는 단체를 찾다가 문화연대를 알게 됐다. 그는 문화연대에 입사하여 활동가라는 삶을 살게 된다.
 “그때는 내가 사회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이력서 쓰는 방법을 몰랐어. 그래서 종이 이력서 사서 썼지. 그리고 문화연대 수준이면 당시에 학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서 그냥 ‘졸업-입학’ 이렇게 쓰지 않고, ‘졸업-졸업’만 썼지. 사진 붙이고 자기소개도 없이. 대충 여섯 줄 썼나? 써서 냈는데 서류에서 떨어뜨리려고 다 그랬었데. 이거는 애는 성의가 없다. 그래도 예전에 사무처장 하던 용진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래도 한번 보자 이 애 궁금하다. 그래서 면접을 봤어요. 나는 될 애가 아닌데 됐다고 다들 그러더라고. 서류 탈락이라고. 나도 처음에 사무처 활동가로 들어왔고, 면접 볼 때 본인이 생각하는 활동을 안 하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때 모든 괜찮다고 그랬거든.” 

 

신유아를 키운 현장들

  어렵사리 들어온 문화연대. 그녀는 잡일을 하며 일을 배웠다. 그 잡일이 그녀는 싫지 않고 즐거웠다. 처음 2~3년 동안 다른 활동가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일을 거들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일을 배웠다.
 “앰프 나를 때 앰프 날라주고, 가서 피켓을 들고 있으라고 하면 피켓 들고 있고. (그걸) 2~3년 했어. 그때는 내 일이라고 생각되는 게 없어. 근데, 나는 그때 그게 재밌었어 … 내가 활동하면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게 대추리야. 대추리 투쟁할 때 문화연대가 매일 광화문에서 촛불시위를 했어. 매일 촛불시위를 하려면 문화연대가 앰프를 매일 들고 나가서 세팅 해야했어. 가수를 섭외하고. 그때 문화연대에서 그걸 다 했거든. 나는 그때 특별히 한 게 없지만, 그냥 따라다니면서 집회 구성이나 형태를 보게 된 거고. 행사에 다니면서 일하는 법을 익혔어.”
 그러다 신유아는 2007년< FTA 반대 집회>와 2008년<촛불 문화제>를 기점으로 큰 집회에서 다양한 시위를 지원하거나 기획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은 현장과 예술을 잇는 문화 활동가로 성장할 수 있게 한 큰 배움이 된다.
 “2007년 <FTA(반대 집회)>와 2008년< 촛불 문화제>가 있어. FTA 때 원재가 상황실장이었고, 내가 서포터였어. 노동판에 대해그림을 그때 처음 그렸고. 내 머릿속에 집회라는 것과 개념이 그때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었지. 대학 때 집회 하던 거 말고, 사회에 나와서 집회 기획하는 처음 봤지 … 내가 씩씩해지기 시작했던 건 대추리와 FTA가 막 믹스될 때. 대추리가 끝물이고, FTA 시작될 때. 그 두 가지 안을 가지고 플랑 시위를 했었지. 플랑을 크게 만들어서 광화문 삼거리, 광화문 위에 올라가 플랑 내리는 시위를 기획이었어. 전과 없는 애들, 용기 있는 애들을 모았는데 그때 문화연대에서는 나랑 완이가 하기로 했어. 그때 나는 세상에 대한 용기가 생겼지. 대추리 때 처음 잡혀가긴 했지만, 그때는(광화문 플랑시위) 정말 용감했어. 그런 거에 겁이 별로 없었어. 상황실이라는 건 2007년 FTA 때 원재 통해서 공부를 많이 했지. 2008년도 촛불 할 때 거리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시위형태에 대해고민을 할 수 있었던 거지. 그 명박산성 나오고 그럴 때 문화연대가 광화문 거리에서 <힘내라, 촛불> 그러면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 그때 집회의 방식이나 형태에 대해서 고민을 했지. 이런 게 나한테는 새로운 경험이었던 거야. 그러고 나서 새로운 형식들을 용산에 막 접목 하기 시작했고 용산에서 제일 많이 컸고. 경험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용산에서 쏟아 부었어.“
 이 과정에서 신유아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문화 활동가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교 구실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능력이 없더라도, 능력이 있는 사람들하고 함께 활동하면서 현장에 최대한 믹스시키는 것. 그러한 활동을 하는 게 활동가의 역할이야 … 나는 보조하는 사람이야. 메인이 싫어. 애들이하는 거 잘하게끔 보조 역할을 하는 게 좋아. 그렇게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나한테 지원을요청해 … (문화 활동가는) 현장 네트워크와 작가 네트워크가 있어야 해. 활동가는 무지 싸돌아다녀야 해. 예를 들어, 임정희 선생님은 강정에서 뜨개 농성을 하자며 아이디어 주셨어. 그것을 현장에 나가서 사람들을 조직해서 실행시키는 것은 활동가의 역할이야. 내가 직접 뜨개를 하는 게 아니라 뜨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내는 역할. 그 사람들을 현장에 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 그리고 사람들이 현장에 갔을 때 현장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사람. 그러려면 활동가는 무지 싸돌아다녀야 해.” 
 문화 활동가로 살면서 신유아에게 <용산>은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이다. 그가 말하는 <용산>은 2009년 서울 한복판에서 도심 재개발에 떠밀려 다섯 사람이 불에 타죽은 <용산 참사>를 말한다. <용산 참사>가 있던 그 날 아침, 그는 TV를 보다가 자막으로 그 소식을 접하고 놀라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바로 용산으로 달려간다.
“용산 장례식장에서 영정 사진을 따로 조그만 방에 모셨어. (깊은 밤, 그 방에서) 박래군 아저씨가 그 영정을 보면서 혼자 술을 마시며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고. 그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라. 나는 원래 슬퍼서 우는 사람이 아니거든. 용산 문제 자체가 힘들고 막막했어.” 
 “상황이 급하다 보니 매일 현장에서 싸움이 있고,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어. 벗어나기가 힘들었고… 사무실에 이야기 안 하고 나 혼자 파견을 간거야 … 6개월 정도 있다가 집행위에서 공식 파견으로 해줬어. 그러면서 용산에서 굉장히 많은 문화예술인을 섭외하기 시작했어… 처음 6개월 정도는 죽음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풍악을 울리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공연은 생각할 수 없었고, 포퍼먼스나 말 그대로 문화 행동. 펜스나 바닥에 그림을 그린다거나 그걸 만들어서 나눠준다거나. 이런 걸 위주로 진행했어. 그러면서 작가들을 많이 알게 됐어. 남일당 뒤에 <레아>라는 호프집을 점거하고, 1층은 전시장, 2층은 상황실하고 미디어 센터, 3층은 숙소. 이렇게  개조를 해서 1층에서 문화제를 하고, 매주 작가들과 함께 전시, 상영회를 열었어. 그때 내가 알던 문화예술인과 내가 몰랐던 다양한 연극, 공연, 미술인들을 만났어. 그 네트워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어. 그때 문화 행동을 기획할 뿐만 아니라 나도 미술 전공한 사람이라 함께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어. 용산은 나에게 있어 문화 행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단은 문화 행동에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방식이 시각적인 게 중요하다는 깨우침을 줬어. 성명서, 페이퍼보다는 시각적인 이미지가 대중의 인식에 크다는 걸 알게 됐지”
 신유아는 <용산> 활동이 끝나고 <쌍용 자동차>, <콜트콜텍> 등에서 벌어진 정리 해고 노동자 복직 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며 노동 현장을 돌아다녔다. 그 무렵 <한진중공업>에서 정리 해고 철회를 외치며 김진숙이 크레인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였다. 당시 현장을 함께 돌아다니던 친구들과 함께 희망버스를 기획한다.
 “그때 한진중공업이 터졌어. 김진숙 지도가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을 때. 뭐라도 해야겠다 하면서 커피숍에서 이야기했어. 처음에 희망열차를 생각했어. 그래서 그때 네 명이 모여서 역적모의를 하며 희망버스를 기획했지. 그러면서 사무실에 또 안 나왔지. 애들한테 욕 엄청 먹었지. 그렇게 쓱 이어진 거야. 욕은 욕대로 먹고. 솔직히 욕먹으면서도 지지를 많이 받았어. ”

 늘 현장에 있고 싶은 사람

 신유아가 안식년에 들어간 지 6개월째. 모처럼 얻은 긴 휴가 동안 그는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서 리스트를 뽑고 책을 샀다. 하지만 투쟁현장에 돌아다니다가 이제껏 읽은 책 페이지 수는 고작 5페이지밖에 안 된다. 그는 솔직히 공부하기보다 돌아다니는 게 훨씬 재밌다. 10년 후에도 현장에 있었으면 좋겠다.
  “늙어 힘없을 때까지는 현장에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현장에 짐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이 들어서도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잖아. (난) 나이 들어도 이상한 늙은이가 되고 싶지는 않아” 
 그가 살아 있다고 느끼며 신나는 순간은 현장에서 사람과 사람을 잇고, 투쟁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을 할 때이다. 그래서 현장을 벗어난 신유아를 상상할 수 없다. 문화연대는 이런 그의 활동을 응원하고 지지해준다. 그에게 있어 문화연대는 큰 버팀목이나 다름없다.
 “내 활동의 밑바탕이지. 신유아하면 문화기획, 문화 행동인데 이런 일을 하게 해준 곳이지. 내가 이렇게 있기까지 문화연대가 없었으면, 안됐다고 생각해. 문화연대가 좀 더 뭐랄까, 좋게 좋게 잘됐으면 좋겠어… 문화연대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들이 사그라지고있잖아. 다시 차고 일어나서 활동력을 가지고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어. 사회운동 단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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