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방]고로를 만나다(44호)

2014년 7월 31일culturalaction

고로를 만나다

강효주/문화연대

홍대 앞 문화기획자

인디밴드에 미쳐 홍대 근방을 기웃거리던 강원도 산골 소녀홍대 클럽을 들락거리다가프리마켓의 자원 활동가로 활약한다이 일이 재밌어 일하다보니 <일상예술창작센터>의 사무처장이 됐다그 소녀는 고로라고 불리는 최현정홍대 앞에서 10년 넘게 이런저런 일을 벌이며, 뼈가 굵은 문화기획자로 홍대 근방 문화예술생태계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여자요즘은 홍대 앞뿐만 아니라 연남동까지 지리적 공간을 확장해서 일을 벌이고 있다연남동에 둥지를 튼 <일상예술창작센터>는 동네주민들이 손으로 무언가를 조물딱 거릴 수 있는 공간이다이곳에서 주민들이 소소한 일상에 깨알 같은 재미를 더할 수 있는손작업(목공예바느질드로잉 등프로그램을 진행한다또한계절마다 마을시장을 열어 동네 사람들끼리 교류의 장을 만든다그렇다고로는 일상과 밀접한 예술작업을 할 수 있게끔 판을 벌이는 것을 업으로 삼은 여자다내친김에 클럽<>사장이자 프리마켓의 문화기획자로 활동하던 김영등과 결혼하여 귀염둥이 동화도 낳았다스스로를 동화 에미라고 부르는 걸 즐거워하는 여자이 여자고로를 만났다.

산골소녀가 사무국장이 되기까지

강원도 바닷가 근처에 살던 고딩 소녀최현정은 우연히 듣게 된 인디밴드에 빠져 방학 때 홍대 앞까지 와서 놀았다그 소녀는 당시 유명했던 <런치박스>를 읽으며 인디감성을 키웠다스무살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에서 살게 된 그녀는맘 놓고 홍대 앞에서 죽치고 논다자신의 영상전공을 살려 소요락 페스티벌프리마켓 등에서 자원활동가로 활약하며홍대 문화 놀이판에 발을 깊게 들여 놓게 된다. 1년 정도 대학을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홍대 앞에서 친구랑 함께 자취를 했다.

“ …휴학하고 홍대앞에서 친구랑 같이 자취를 했어요그때 친구가 클럽빵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저는 신촌에 있는 홍익문고에서 알바를 했어요그때는 빵이 이대 후문에 있을 때였는데알바 끝나고 나서 빵에 가는 거예요친구랑 같이 집에 갈려고빵에서 공연보고친구랑 같이 집으로 넘어 오는 거예요그렇게 하다가 <>사장 김영등씨와 알게 됐고김영등씨가 평일 낮에 뭐하냐고 물었고평일 낮에 하는게 없다그랬더니 그러면은 내 사무실에 와서 일을 좀 도와라그래서 자원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해서스무 한살 고로는 <프리마켓홍보에서부터 참가자 진행안내쓰레기 정리 등등 온갖 잡일을 하며 매주 홍대 놀이터에서 자원 활동을 했다당시 <프리마켓>은 김영등이라는 문화 기획자만 상근 활동가였고나머지는 자원 활동가로 운영되었다후에 이들이 모여서 2003년 <일상예술창작센터>를 설립하고그 일과 관련된 좋고나쁜 일들에 얽매이다 사무처장까지 되어버렸다. 2010년부터 <일상예술창작센터>는 사회적 기업이 되었고, 예전에 비해 단체의 운영규모가 커졌다. 처음 상근자가 4명이었는데 현재 12명이다그러면서 할 수 있는 일의 가지 수도 늘어났다. <일상예술창작센터>는 정말 다양한 일을 벌이고 있다홍대 앞 프리마켓뿐만 아니라 명동 외환은행 근처에서 <명랑시장>을 연다일인 창작자들의 작품활동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작품 판매숍 <새끼>도 운영한다다가오는 9월에는 <핸드메이드페어>행사를 크게 열 예정이다.  게다가, 동네주민들이 손작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연남마예스트로프로그램을 진행 중 이고,  계절마다 <연남시장>을 개최한다. “실제로 생활하고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마을 일이 삶의 활력이라 되게 재밌다는 고로그래서 그런지연남동에 터를 잡은 단체들과 모여 <연남동 반상회>를 꾸려 마을에서 할 수 있는 공익적인 일들을 속닥속닥 도모하고 있다. “사무국장으로 영리성 사업으로 수익을 내야하고아이엄마이자기획자의 어떤 욕망마을에서 일어나는 재밌는 일들이런 것들을 함께 가져가야 하는데이게 가장 큰 고민이다.” 고 말하는 고로.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다 잘해내고 싶어 하는 욕심쟁이다.

문화연대를 사랑하는 사람

문화연대하면고로는 이원재 옹을 떠올린다왜냐하면고로가 문화기획자로 살아가는데이원재(現 문화정책센터 소장)가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프리마켓이 자리 잡던 초창기 2003년에는 프리마켓을 문화로 보지 않았다프리마켓에 참가하는 일인 창작들을 노점상들의 집단장사하는 애들로 취급하며지자체에서는 공공장소를 대여해주거나예산을 지원하길 꺼려했다그래서 프리마켓 기획위원단을 꾸려 프리마켓을 홍대 앞에 지속시키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했다.

“ …그런데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작업들을 혼자서 꼬물꼬물하고 있었고할 만한 장소가 필요했었던 거죠그래서 아이걸 계속해야겠다 했을 때도와줄만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어요그렇다고 단체도 아니고저 같은 피라미들이랑 김영등이라는 사람 밖에 없었죠안영로 같은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프리마켓 기획위원이 됐던 거예요안영로이원재김규원 박사(문화정책연구원), 이무용(시정개발원 연구원), 류병학(독립큐레이터), 이광준(시민자치문화센터 소장), 이석문(카바레사운드)… 가장 생소한 사람이 이원재 옹이었어요이원재 옹 빼고는 다 문화판에서 놀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원재는 (사회)운동하는 사람이라고 누가 처음 데리고 왔는데 그때 긴 머리에 헤어밴드하고스포츠 나시티 입고 왔어요… 김영등씨한테도 생소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계속 우리 활동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해줬어요.”

프리마켓 기획위원인 원재 옹을 알게 되면서, <일상예술창작센터>와 문화연대 사이에 접점이 형성됐다그렇게 해서 문화연대와 함께하는 일들이 늘어났다제주에서 축제공연을 기획해서 프리마켓 작품들을 전시하고 판매하거나 문화 소외지역으로 찾아가서 영화도 상영하고생활창작워크숍을 하는 <달리는 놀이터>도 함께 했다문화연대가 4대강 반대사업에 매진할 때는 프리마켓 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하도록 도왔다. 1~3년 동안 <썸머 모던락 페스티벌>을 헤이리일산 등에서 문화연대와 함께 개최하기도 했다그중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의 투쟁을 지지하며 <썸머 모던락 페스티벌>을 공장에서 진행하려했었다.  그러나 사측에서 고용한 용역들이 공장에 못 들어가게 해서 인천 민주노총 지하 강당에서 진행했던 그 페스티벌은 고로의 기억에 남는다. 일 뿐만 아니라 고로는 조직을 운영하면서 부딪히는 어려움이 생기면 원재 옹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고로에게 원재 옹은 멘토이자 어르신 같은 존재다한 때 고로는 문화연대 활동가가 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홍대 앞에서 복작거리는 것보다 사회를 바꾸는 일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하지만원재 옹이 너가 문화연대 오면김영등이 문화연대 폭파 시킬거야라는 말에 문화연대 활동가로 사는 건 단념하게 된다원재 옹뿐만 아니라 문화연대에서 오래 일한 신유아송수연최준영 활동가를 보거나 문화연대를 거쳐간 사람들을 오랫동안 보면, 고로에게 문화연대는 좋은 단체임이 틀림없다그런 문화연대가 작년 말쯤 <일상예술창작센터가까운 곳으로 이사와서 그녀는 신난다문화연대와 <일상예술창작센터>를 가로막는 코오롱 하늘채 아파트가 가끔 얄밉다그것만 없었다면더 자주 오고 갔을 텐데 아쉽다마지막으로 문화연대에 대한 쓴소리나 혹은 바라는 점을 이야기 해달라고 했더니고로는 문화연대에 바라는 게 없다며 무한 사랑을 드러냈다그래서 인터뷰를 더 진행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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