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민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향해, <블랙딜>의 저주(44호)
[편집자주] 우리가 매일같이 마시는 물, 모든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데 필요한 전기, 음식을 조리할 때나 난방을 할 때 필요한 가스 같은 것들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현재 인간의 삶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공공재들을 공적 영역이 아닌 사적 영역에서 사유화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블랙딜>이 잘 보여주고 있듯, 공공재의 민영화는 잠시동안 특정 기업이나 기업소유주의 배를 부르게 할 수 있겠지만 우리 모두의 삶에 위협을 가하는 무기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지금 민영화로 인해 파괴되고 있는 우리의 공공성은 어디쯤에 있을까요? 그래서 이번 <문화빵>은 “지금, 공공성”이란 기획으로 우리의 공공성에 대해서 다뤄봤습니다.
① 함께 공공성을 지킬 방법은? / 하승우 (땡땡책협동조합 땡초)
② “‘민영화 반대’ 연극 말고, 진짜 운동이 필요하다” – <지금, 공공성> 포럼 / 박장준 (미디어스 기자)
③ 민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향해, <블랙딜>의 저주 / 고대권 (자유기고가)
민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향해,
<블랙딜>의 저주
고대권 (자유기고가)
영화 <블랙딜>의 한 장면. 1980년대 대처는 민영화의 포문을 열며 선언했다.
“이제 민간인이 (공공재의) 주식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료화면 속의 인물들은 대처의 이야기에 박수로 화답한다. 대처는 환하게 웃고 있다. 이 웃음에서 시작되었다. 민영화에 대한 호기심 천국은. 사실 그 동안 민영화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외면했었다. 아마도 민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민영화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러나 <블랙딜>을 보고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일단 생각이라도 한 번 해보자는 저주. 그래서 단지 한 가계의 살림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영화가 주는 충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위안코자 몇 가지 호기심을 정리해보았다.
일단. 도대체 민영화란 무엇인가? 공공재의 소유자(주인)는 분명하지 않다. 당장 국민 모두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공공재의 성격 상 ‘국민 모두’에는 미래세대도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국가–특히 행정부는 이의 관리를 위임받았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대처는 그런 공공재의 주식을 민간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원래 주인이 국민인데, 이제 국민이 주식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주식회사로 치자면 오너였던 국민이 삽시간에 주주의 위치로 내려앉은 셈인데, 이게 축하받을 일일지 모르겠다. 사실 한반도에서 이런 시도가 무척 오래전에 있었다. 김인홍이라는 건달이 대동강 물을 한양의 상인들에게 4000냥에 팔았다는 내용의 유명한 ‘소설’이 1906년 황성신문에 실렸었다. 봉이 김선달로 더 친숙한 이 이야기, 공공재 민영화는 정말 사기나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인데 현실이 되고 있다.
무언가 민영화의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남게 되는데, 그 지점엔 어김없이 ‘거대자본’이 등장한다. 거대자본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공공재를 활용해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자본’, ‘공공재를 구매/소유할 수 있는 자본’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거대자본은 국민의 것이었던 공공재를 약간의 가공을 통해 국민에게 되팔아 이익을 남긴다. 그 과정에서 공공재의 질과 서비스를 개선하는 투자를 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공공재의 질과 서비스를 개선하는 문제와 민영화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다. 예를 들면 국가는 공공재의 질과 서비스 개선과제를 민간기업이나 공기업에 별도 용역으로 맡길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석연치 않은 점에 대한 정부측 대답은 흔히 ‘재정적자 해소’다. 민영화를 통해, 공공서비스를 국가가 제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적자도 해소하고, 더 나아가 공공재 자체를 팔아서 뭉칫돈을 형성해서 적자를 갚겠다는 의도인 것 같다. 그러나 이익의 확대가 지고의 목적인 민간기업에서 이익이 남지 않는데 민영화에 참여할 리는 없다. 민간기업이 이익을 남기는 방식은 국가의 보조/지원/특혜와 서비스 비용의 인상 정도일 것이다. 하나는 국민의 세금부담으로, 또 하나는 국민의 이용료 부담으로 돌아온다. 사실상 재정적자 해소를 위해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간다는 이야기다. 민영화 한다고 국민의 소유물인 공공재를 마음대로 내다 팔고, 국민들은 이를 이용하기 위해 이용료를 내야하고, 여기에 민간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세금을 다시 내야한다는 것인가?
여기에서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존재가 등장한다. <블랙딜>은 이 지점을 짚어냈다. 바로 IMF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IMF는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이번엔 IMF에서 국가의 적자를 계산하는 방식을 바꾼 것이 문제가 되었다. 국가의 적자를 계산하는데 정부의 적자만이 아니라 공기업 등의 적자도 통합해서 계산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셈법에 따르면 당연히 이전에 비해 적자가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적자가 증가하니 국가의 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는 다시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에 대한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 문제는 공기업의 적자까지 통합되는 이 새로운 셈법이 왜 등장했냐는 것이다. 이 셈법은 한마디로 ‘돈이 될 수 있는,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라’라는 주문이다. 초국적인 자본이 사고 싶은 무언가가 당신의 나라에 있다면 모두 팔아치우라는 것인데, 도대체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상상이 안 된다. 나라의 공공재를 혹은 그것의 사업권을 초국적 자본의 입맛에 맞게 구조조정을 해낸 후 그들에게 떠먹여주는 것이 재정적자 해소라면, 그 적자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이 나라의 자산은 무엇이 남게 될까? 나중엔 나라를 통째로 팔기라도 해야 할까? 이미 한 번 나라를 팔아먹었던 한반도의 정치권력이라 더 불안하다.
그래, 문제는 정치다. 뭔가 납득이 되지 않는 이런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심상치 않은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대처의 화법은 공공재의 원 소유자인 국민과 ‘주식을 소유할 수 있는’ 민간인을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공공재에 대한 소유와 관리의 문제를 정치의 영역에서 시장의 영역으로 이전시켰다. 그 동안 공공재의 소유와 관리에 대해 국민은 정치적 힘을 발휘해 통제할 수 있었다. 입법부인 의회의 구성, 의회를 통한 행정부의 감시는 이를 위해 존재한다.
공공재가 민영화되면서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국민의 힘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정치적 권리가 아니라 재산으로부터 나온다. 더 많은 주식을 소유한 자가 더 많은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주주가 아닌 자는 (공공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필연적으로 소비자인데, 조직되지 않은 소비자의 힘은 언제나 거대자본 앞에 ‘호갱’이다.
이는 민영화 후 공공재의 주식 중 지배적인 권리를 국가가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공공재가 시장에 나온 이상, 공공재는 시장의 법을 따라야 한다. 시장의 각종 제도와 법은 주주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선에서만 주주로서의 국가의 권리를 옹호할 뿐, 모든 주주들의 권리에 앞서 전적으로 국가–국민의 권리를 옹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주주’로서의 국가도 이미 그 내부가 다양한 이해관계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온전히 단일한 의지를 가진 주주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기에 WTO, IMF 등과 보조를 맞추는 초국적자본이 개입된다면 그나마 비실비실한 국내법은 설 자리가 없다.
즉 민영화라는 과정은 단순히 공기업을 민간에게 판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국가라는 총체에서 국민의 정치적 권리와 역할을 퇴행시키는 수순이다. 그런데 이런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이 ‘정치’가 하고 있는 일이다. 김대중 정부시절부터 지금까지, 여야를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정치는 국가에서 국민이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인1표의 평등적 권리 행사는 국민이 지닌 가장 큰 힘 중 하나다. 국민은 정치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드러내고 정치권은 이러한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화된 자본, 권력과 싸워 국민의 권익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국민의 대표는 자본의 대표와 다양한 방식으로 연계를 맺고 국민의 기대를 배신한다. 배신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자본과의 검은 거래를 통해 나라의 곳간, 국민의 삶의 근간을 헐값에 내준다. 정치가 이 모양이면 국민은 허리가 휜다.
이 외에도 궁금한 점이 무척 많아졌다. 하지만 지면은 짧다. 영화 ‘블랙딜’은 민영화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영화는 아니었다. 즉 위의 여러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블랙딜’에서 모두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영화에 대해 토론해봐야겠다’는 문제의식이 생겼다.
민영화는 두 가지의 작동원리로 우리 사회에서 관철되었다. 재정적자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고, 공공재를 활용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욕망을 자극했다. 공포와 욕망을 동시에 자극했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은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었다.
영화 <블랙딜>이 보여주는, 우리보다 먼저 민영화를 진행했던 일곱 개 국가에서의 사례는 민영화의 관철이 공포와 욕망, 혹은 무관심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영화는 충분한 토론과 합의가 필요한 문제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토론의 공간이 없다. 영화 <블랙딜>과 <블랙딜>의 공동체 상영이 그런 토론의 시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