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종의 대중문화의 해체와 재구성]어느 색정증 환자의 고백: <님포매니악 볼륨 1&2>를 보고(43호)

2014년 7월 16일culturalaction

어느 색정증 환자의 고백: 

 

<님포매니악 볼륨 1&2>를 보고

이윤종 / <문화/과학> 편집위원

yunjong_lee@naver.com

라스 폰 트리에가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그의 영화 <님포매니악 (2013)>으로 <안티크라이스트 (2009)>와 <멜랑콜리아 (2011)>에 이어 “우울증 3부작 (Depression Trilogy)”을 완결 지었다. 여성 색정증 환자라는 뜻의 “님포매니악 (nymphomaniac)”을 제목으로 내세웠을 때부터 예측했으나, 각각 2시간 정도씩인 볼륨 1과 볼륨 2의 두 편으로 나누어 개봉한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섹스 중독자인 중년의 여성이 자신의 성적 여정을 한 남성에게 고백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편으로 편집돼 총 4시간여에 달하는 현재의 전 세계 극장 개봉용 버전은 감독판인 6시간 분량을 나름대로 압축했다고 하고, 영화 속에 계속 해서 등장하는 하드코어 포르노적인 성기 노출과 성기 접촉 장면은 실제 배우들의 것이 아니라 포르노 배우들의 것을 편집해서 완성했다고 한다. 우울증 3부작 이전부터 주류 영화에서의 포르노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던 폰 트리에지만, 이전 영화에서는 주로 배우의 전신 노출 등의 형식으로 소프트 포르노적인 선에서 머물렀다면 <안티크라이스트>에서부터는, 물론 실제 포르노 배우들을 대역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한국 극장에서는 이 모든 장면들을 뿌옇게 처리하긴 했지만, 하드코어적인 실제 성기 삽입이라든가 성기 장면의 클로즈업을 통해 다시 한 번 상업적 포르노그래피와 예술적 에로티카라는 기존의 이분법이 와해되었다.
실제로 우울증 때문에 자살 직전까지 이를 정도로 고통 받았다는 폰 트리에는 우울증 3부작에서 여성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심리 상태를 투영하고 있다. <안티크라이스트>와 <님포매니악>에서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자신의 부모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샬로트 갱스부르가, <멜랑콜리아>에서는 헐리우드 스타인 키얼스틴 던스트가 매우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여성들로 등장한다. 갱스부르는 이제는 폰 트리에의 페르소나가 되었는지 <멜랑콜리아>에서는 던스트의 언니로도 등장해 서브 주연 캐릭터를 맡기도 했다. <안티크라이스트>는 제목 그대로 갱스부르가 연기하는 여주인공을 서구의 기독교적인 가부장문화에 반감을 느끼는 마녀적인 캐릭터로 설정해, 그녀가 남성과 여성의 성 전쟁의 역사에 대한 석사 논문을 준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학문적 주제를 일상에서 몸소 실천하기 위해 어린 아들과 남편을 희생물로 삼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감독의 전작인 <브레이킹 더 웨이브 (1996)>에서 에밀리 왓슨이 연기했던, 아픈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던 여주인공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캐릭터이다. <멜랑콜리아>에서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여성이 결혼식 도중에 갑자기 결혼을 깨뜨리고, 상류층의 부유한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언니로부터 위안을 얻고자 언니의 집에서 머물다가 어느 날 지구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의미심장하게도 우울증(depression)의 구식 영어, 혹은 라틴어에 기반한 서구어 표현인 “멜랑콜리아 (melancholia)”라 불리는 행성이 지구와 충돌하기 직전 극심한 공포와 패닉에 시달리는 언니와 달리 여주인공은 이전까지 제멋대로 날뛰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차분하고 편안한 모습을 보인다. 정신의학적으로 극단의 위기에 처했을 때 우울증 환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차분해 진다는데, 폰 트리에는 이를 영화에서 그려내고 싶어 했다고 한다.
<님포매니악>에서는 우울증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색정증의 여성이 사춘기 이래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남성들과 성 관계를 맺으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어느 날 밤 심하게 얻어맞고 골목길에 쓰러져 있는 중년 여성을 한 중년 남성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보살펴 주면서 왜 그녀가 그렇게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 묻고 그 얘기를 들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미셸 푸코가 <성의 역사 1>에서 서구의 오랜 성적 억압의 역사가 천주교의 전통인 고해성사와 같은 고백의 형식으로 유지됐음을 밝힌 것처럼, 영화는 중년 여성이 유년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겪은 온갖 성적 경험과 기행들을 고백하며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서사를 진행한다. 푸코가 교회의 억압적 권력과 프로이트 이래로 굳어진 상담 치료를 통해 형성되는 정신과 의사 혹은 상담가가 환자에게 행사하는 권력에 대해 비판적인 것처럼, 폰 트리에도 기독교 교회의 신부 혹은 목사의 역할과 정신과 의사 내지는 상담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중년 남성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첫 번째 볼륨 전체와 두 번째 볼륨 중반까지 중년 남성은 친절하고 인자하게, 세상의 모든 종류의 욕망이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인 것처럼, 다소 자학적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성에게 계속해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연기한다. 갱스부르가 연기하는 중년 여성이 세상의 모든 윤리적 잣대에 괘념치 않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성적 여정을 걸어왔다면, 갱스부르 훨씬 이전부터 폰 트리에와 같은 덴마크인으로서 감독의 영화적 동지로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한, 중년 남성 역의 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성 관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성적인 것에 관심도 없고 성욕조차 갖지 않은 남성으로서, 영화 속에서 자신의 모든 욕망을 거세한 인간을 자처하고 나선다. 평범한 남성이라면 여성의 고백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성적으로 흥분해서 둘 사이에 성적 교류가 오가는 설정이 필요했겠으나, 스스로 “총각”임을 자처하는 이 남성은, 포르노에서는 흔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아주 흔하지는 않은, 불륜이나 동성애는 물론이고 쓰리썸이나 SM 등의 모든 종류의 성적 경험을 갖고 있는 여성의 고백에 어떠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남성의 집에 있는 낚싯대며 남성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철학적, 미학적, 음악적 지식과 남성의 집 벽에 생긴 총 모양 얼룩을 소재로 여성의 고백에 의미를 부여한다. 급류 낚시의 미끼에 대한 스카스가드의 설명에 갱스부르가 십대 시절 어떻게 남성들을 유혹했는지 부언하고,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차이에 대해 논하며 성적 열락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클래식 음악의 화음에 대해 논하며 동시에 다수의 남성을 만났던 여성의 성적 경험을 종교음악의 화음에 연결시키기도 하며, 여성의 첫 성적 경험의 대상이자 평생의 사랑이며 자신이 낳은 아기의 아빠이기도 한 남성과의 오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과 배신과 복수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아무런 사심 없이 듣는 듯 하던 스카스가드가 아침이 밝아오며 지쳐서 잠든 갱스부르의 침대에 다가가 갑자기 섹스를 구걸하는 순간, 갱스부르는 자신이 배신했었고 자신을 배신했던 첫사랑에게 당기려다가 당기지 못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고백을 하나 하자면, <님포매니악 볼륨 1>에서 낚시와 종교, 음악, 식물학 등의 방대한 지식을 인간의 성과 연결시키는 폰 트리에의 예술적 역량에 감탄하여 나름대로 볼륨 2가 개봉하자마자 서둘러 극장에 달려갔지만, 마지막의 뻔하고 예측 가능한 결말에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마지막에 스카스가드가 갱스부르에게 성적으로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을 것이고, 그 수많은 남성들과 성 관계를 맺었던 갱스부르가 스카스가드와의 관계는 끝끝내 거부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이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순간, <안티크라이스트>와 <님포매니악 볼륨 1>을 보고 이전부터 나를 불편하게 했던 폰 트리에의 수많은 문제적 여성혐오의 징후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영화에 대한 나의 기대감도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멜랑콜리아>를 보며 위급한 순간 차분해지는 우울증 환자의 단면을 그려내기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을 영화에 쏟아 붓지 않았나 하는 실망감을 느꼈던 것과도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어찌 보면 그 수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예측이 불가능하고 다소 신선한 서사 전개를 선사했던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최근에 너무 예측 가능해져서 실망스러운 것과 같은 맥락인 듯 싶기도 하다. <님포매니악>에서 갱스부르가 모든 고백을 마치고 잠들기 전, 스카스가드가 갱스부르의 기행이 여성에게 가하는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인 성적 일탈, 그것도 남성이라면 사회적으로 그다지 크게 문제되지 않을 일탈이라고 결론 내리자, 갱스부르가 너무나 진부하고 뻔한 논평이지만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한 심정이 나에게도 전이된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면, 정신과 의사와 환자, 혹은 종교인과 신도의 관계에서 공적인 관계가 사적인 관계로 치환되는 순간 후자가 전자에게 느낄 수 있는 환멸을 피하기 위해 <님포매니악>의 색정증 환자가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일 수도 있고, 고백을 듣는 남성이 이전까지 취한 모든 제스처가 사실은 권력자의 위선이었기 때문에 위선 없이 표리부동하지 않게 살아온 여성이 위선에 대해 가하는 응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멜랑콜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님포매니악>에서도 폰 트리에는 그다지 새롭거나 흥미롭지 않은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너무 큰 담론들을 끌어다가 자신의 영화를 포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정신과 의사/상담가와 종교인의 권력과 위선을 비판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고 별 것도 아닌 문제가 아님에는 분명하지만,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 여성이 걷는 여정은 너무나 가시밭길이다. 이는 다른 의미에서 예수나 부처가 걷는 고행과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고난의 길은, 단순히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 겪는 그것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길이어서, 폰 트리에가 여성혐오자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처럼 <님포매니악>의 여주인공도 그녀를 구원해 줄 초월적 존재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자신의 구원자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구원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 색정증 여성과 반대로 성적 욕망이 없는 척 했던 남성이 색정증 환자의 구원자가 될 수 없는 순간, 이 여성은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질병의 치료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직까지는 결말이 다소 지지부진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단순하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이 영화 속에 들어 있고, 어느 순간 갑작스런 에피파니를 느껴 영화에 대한 나의 평가는 한순간 뒤바뀔 지도 모른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안티크라이스트>를 보고 일주일 동안 내내 영화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처럼, <님포매니악>에 실망했다고 해도 앞으로 한동안은 이 영화에 대해 계속 생각할 것 같다. 그리고 라스 폰 트리에의 다음 영화가 개봉되면 아마 나는 또 다시 극장으로 달려갈 것이다.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Prev Post Next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