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방]문화백수, 숙현을 만나다(43호)

2014년 7월 16일culturalaction

문화백수, 숙현을 만나다

인터뷰+정리 : 강효주 / 문화연대

 텃밭지기 숙현

 연남동 문화연대 옥상에는 텃밭이 있다. 옥상텃밭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길가에서 주워온 포대나 스티로폼 상자를 올망졸망 늘어놓고, 거기에 다양한 식물들을 심어 놓았다. 텃밭지기 여섯명이 모여 당번을 정해 물도 주고, 어쩌다 한 번씩 모여 식물도 만지고, 쌈 싸먹고 놀기도 한다. 숙현은 그중 한 사람이다. 친구와 함께 목화, 봉숭아 등을 심고 가꾼다. 시대의 유행을 따라 에코라이프에 편승하려고 텃밭을 덜컥하게 되었다는 숙현. 요즘 영페미니스트의 기본 아이템은 ‘에코, 고양이, 요가’다. 이 세 개를 갖춰야 한다고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웃다가 우연찮게 문화연대에서 텃밭지기를 모은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화연대 옥상에 들락거린다.
 알고 보니, 숙현은 오랜 문화연대 회원이다. 대학생 시절 회원으로 가입해서 어쩌다 보니 벌써 10년이 넘었다. 예전에 문화연대는 회원을 대상으로 예술 공연 티켓을 나눠주는 이벤트를 많이 했다. 당시 숙현은 그 티켓을 받기 위해 열심히 문화연대 소식지를 봤다. 그때 이벤트에 당첨돼서 본 공연 중 대학로 소극장에서 했던 <벽을 뚫는 남자>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2003년쯤에는 문화연대의 ‘아파트 가꾸기’ 사업에 자원 활동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서울지역 아파트에 가서 농산물 직판장을 벌이고, 동네주민 모임을 꾸리는 것을 도와주고, 아이들 얼굴에 나비 그림도 그리기도 했다.

 문화백수로 성장하다 

 고딩 시절 숙현은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었다. 얕은 물에는 가지 않는다는 고딩 특유의 허세와 가오. 이 당찬 마음가짐으로, 당시 유명했던 키노, 씨네21 등 영화잡지를 섭렵하며 영화를 깊게 팠다. 바퀴벌레 나오는 부산 광복동 영화관에서 영화도 자주 봤고, 경성대 영화동아리 횃불에서 구하기 힘든 한국 영화 감독들의 작품도 접했다. 고1 때 <부산 국제영화제>가 처음 개최되었는데, 그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교복 차림을 하고 부산 서면의 클럽 <반>에서 하는 영화 이론 강좌를 듣기도 했다. 뭔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 수업을 들으며 영화평론가의 꿈을 키웠다. 그때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영화평론을 하려면 미학공부를 해야 한다고 해서 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대학시절 숙현은 학교수업보다 외부 활동에 열중했다. 당시 시대흐름을 타고 다양한 문화예술 단체와 문화행사 등이 범람했다. 숙현도 이런 흐름에 따라 영화제, 페스티벌 등에서 자원 활동을 많이 했다. 문화연대도 그중 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헤비메탈, 예술 영화 동호회 활동도 열심히 했다.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모여 클럽에 가서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며 헤드뱅을 하고, 다음날 목에 무리가 가서 깁스한 듯 목이 뻣뻣해져 구부리지 못하는 숱한 나날을 보냈다. 또한, 서울아트시네마가 만들어지기 전 비디오 테크가 있던 시절, “정말 매니악한 찐따 같은 애들이 모여 하루에 영화 3-4편을 죽빵 때리며” 보고 놀았는데 그중 한명이 숙현이다. 그때 누벨바그 영화 같은 예술 영화를 참 많이 봤다. 그런 경험들이 이어져 대학원에 가게 된다. 대학원의 전공은 영상커뮤니케이션. 주로 미디어 문화를 연구하고, 때때로 실험영화를 만드는 작가로 활동한다. 한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또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서 석사를 거쳐, 다시 또 한국에서 박사과정 수료. 알고 보니, 외국 유학파, 고학력 엘리트다. 이 여자, 이걸 자랑 삼아 말하지 않고, 자조 섞인 말투로 “너무 많이 배운, 가방 끈이 긴 여자”라며, 자신을 문화백수로 규정짓는다.
“ 제 석사 논문이 <문화백수의 정치성과 정체성에 대한 탐구>였는데 제 삶이 나와요. 앞에 자기 기술지처럼 나와요. 논문도 실험적이에요. 되게 특이한, “experiment”한 논문. 주변에 서 질적방법론을 듣고, 실제로 실행한(적용한) 논문은 처음이 있었어요. 제 주변에 문화백수들. 맨날 영화 쳐보러 오는 애들. 그런 애들 그러다가 영화 만들고, 그러다가 아마추어리즘에 경계에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탐구… 그 당시에 제 입장도 그 경계에 있었고. 그런 친구들 인터뷰하고. 어떻게 난 문화백수로 살아왔는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어요.”
 실험영화를 하게 된 건 우연찮게 주어진 시간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숙현. 원래 예술 영화를 많이 봤고, 특별히 실험영화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학원 석사 때 여름방학 동안 실험영화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실험영화에 발을 딛게 되었다.
 “실험영화는 나의 아이디어 위주로 다양한 방식으로, 이전에 했던 문법들을 깨는 방식으로 해볼 수 있고, 그런 면에서는 작업을 해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숙현에게 실험영화는 철학적 측면에서 개념이나 이론적인 부분을 접목할 수 있고, 혼자 제작할 수 있어 매력적이고 즐겁다. 그동안 숙현이 만든 영화들은 다음과 같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 3동>, <The crossing>, <모던한 쥐선생과의 대화>, <죽은 개를 찾아서>, <도시정물>, <Hold me>. 한국영상자료원에 가면 볼 수 있다.
 가방 끈 긴, 실험영화 감독으로 산다는 게 숙현은 가끔 불안하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학력자본도 없이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자기 삶을 꾸리는 사람들을 보면 숙연해진다. 그 사람들에 비하면, 스스로가 나약하기 그지없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동안 자신의 삶을 “아카데미아에 기대 기생충처럼 운 좋게 좋은 부모를 만나 학교도 다니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며, “운빨과 함께 지금까지 잘 견디어”왔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앞으로 1%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숙현은 지금 하는 일이 재밌다. “평생 재미를 추구”하며 살았다고 자신이 걸어온 삶에 대해 만족해하며 후회 없이 말한다. 정말 숙현은 혼자서도 잘 놀고, 재미를 추구하며 즐겁게 사는 사람이다. 최근 영국 에딘버러 영화제에 숙현의 작품이 출품되어 가게 됐는데, 그곳에서도 바닥에 떨어진 하찮은 돌을 보고도 즐거워했다. “야~ 에딘버러 돌이다~” 이러면서.

숙현에게 문화연대란 

 비록 숙현이 문화연대 오랜 회원이지만, 현재 숙현의 삶에서 문화연대는 존재감이 없다. 10년 전 숙현이 보았던 문화연대는 젊은 활동가들이 많았다. 그 당시 문화연대 주축이었던 사람들은 젊고 유명한 재미난 분들이었다. 헌데, 지금의 문화연대는 일한지 얼마 안 된 막내 활동가 나이가 32살이다. 와우! 이런 걸 보면 문화연대가 늙었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말해 요즘 문화연대 활동을 눈여겨 보지 않는다. 문화연대가 발행하는 뉴스레터 <문화빵>도 마찬가지다. 숙현의 메일함에는 문화예술 관련한 온갖 단체들에서 보내온 소식들이 가득하다. 그것들을 일일이 클릭해서 보는 일은 없다. 오히려 우편으로 소식지가 오면 손이 가게 되고 괜시리 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현은 문화연대를 “그래도 지지”한다. 사소한 바램이 있다면, 예전처럼 다양한 문화행사 회원이벤트를 더 했으면 좋겠다. 최근 회원이벤트에 오르는 문화 행사들은 대중적인 취향과 달리 무겁게 느껴진다. 좀 더 가벼운 일반회원을 염두해 둔 대중문화 행사 관련 초대이벤트가 더 생겼으면 좋겠다고, 숙현은 생각한다.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Prev Post Next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