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적 재난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이성(42호)

2014년 7월 3일culturalaction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8일이 지났습니다. <문화빵> 42호 특집은 세월호 참사와 한국의 재난자본주의, 그리고 재난에 대응하는 예술행동의 사례를 돌아보는 꼭지로 구성되었습니다.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온갖 문제점(노동유연화, 민영화, 규제완화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시민들의 요구가 계속되는 지금, ‘기억, 행동, 연대’의 관점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딛기 위해 함께 읽어보길 권합니다.
1. 재난, 상징화 그리고 애도의 규격화 – 김종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한국적 재난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이성 –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3. 참사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 3.11 이후 재난에 대응하는 일본 공연예술계 다시보기 – 정진세,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인

한국적 재난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이성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신자유주의 때문인가?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충분한 시간을 두고 그 원인을 규명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한국 자본주의의 압축적인 알레고리와도 같다. 그 참사가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가 너무나 복합적이고 중층적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피로사회』,『투명사회』라는 화제의 저서를 출간한 베를린예술대학의 한병철 교수는 독일의 한 일간지에 기고한 “배는 우리 모두다”라는 글에서 “침몰한 세월호는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가라앉는 배를 탈출한 선장은 공공심을 그저 망상이게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육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지 승무원의 부주의나 비전문성 또는 한국의 국가적 특색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 사고로 간과될 수 없다”며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노동유연화, 민영화, 규제완화를 야기한 신자유주의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불행한 참사의 궁극적인 책임은 선장이나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 “현대의 전 경영자이기도 했던 전 이명박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근거로 이명박 정부가 20년 선박의 생명연한을 30년으로 연장시킨 규제 완화정책, 해양사고 업무가 비용 절감을 위해 재난 구조 업무를 부분적으로 사유화시킨 공공 부분의 민영화 정책 그리고 선장을 비롯해 거의 모든 승무원들이 책임을 질 수 없는 비정규직이었다는 노동유연화 정책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규제 완화, 공공부문의 민영화, 노동의 비정규직화라는 신자유주의 핵심 논리가 결국 세월호 참사의 주원인이라는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러한 신자유주의적인 지배 논리만으로 세월호 참사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지배 논리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설명하는 필요조건이라면, 한국적 재난 자본주의의 사회적 성격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충분조건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한국적 재난 자본주의의 사회적 성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의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재난자본주의라 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자본주의 형성에서 ‘재난’의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재난자본주의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이다. 전지구가 모두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면서 에너지, 식량, 이주, 노동, 금융, 정보의 영역에서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조건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위험과 재난을 야기했다. 체르노빌로 대변되는 원전 사고, 사스로 대변되는 글로벌 전염병, 노동유연화로 인한 노동인구의 국제적 이동에 따른 다문화갈등, 유럽발 금융위기, 해킹과 정보전쟁으로 인한 빅-데이터(big data) 파국 등은 현대 자본주의의 성격이자, 재난의 사례들이다.
한국 자본주의 역시 현대 자본주의의 일반적 재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확대 재생산되기 위해서 재난에 대한 위험의 감수는 불가피하다. 아니 자본은 확대재생산을 위해 재난마저도 산업화시켰다. 리스크 계산은 현대경제의 중요한 자산 중의 하나이다. 한국도 이러한 글로벌 위험사회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한국에서 재난자본주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적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재난의 자본주의’이라고 설명될 만큼 특별한 내재적 모순을 안고 있다. OECD 국가 중 한국은 연간 노동시간이 멕시코 다음으로 많은 2,092시간이나 된다.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9.8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국가 중 28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자본주의는 고도성장을 위해 노동자들을 희생시키고 자본가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특혜를 주었다. 1960년대 이래 한국에서 발생한 끔찍한 산업재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마감되었고, 이른바 한국 근대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스타일인 “빨리빨리” 문화는 안전보다는 난개발을, 사람보다는 돈을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어버렸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상품백화점 붕괴 참사는 한국 재난 자본주의를 고스란히 보여준 것들이다.
재난자본주의가 노동자와 서민과 청년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때, 재난의 자본은 거대한 자본 권력을 만들었다. ‘재벌’이라는 말이 글로벌 용어로 사용되듯이 한국 자본주의의 독점화 지수는 세계에서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 자본은 정치, 사법, 군사, 언론, 종교, 교육 분야에 이르기까지 사회 모든 영역에 긴밀하게 유착되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했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급적 문화적 구별짓기가 강화되며, 청년실업률 상태가 장기화되고, 취업과 고용은 부모들의 사회적 자본과 위로부터의 청탁과 로비가 없으면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 자본주의의 비정상적인 행태들은 ‘신자유주의의 일반 지배논리’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재난”의 의미는 한국적 자본주의의 내재적 성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적 재난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지배논리의 일반적인 성격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특이성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재난”이라는 비유가 실제로 지시하는 한국적 재난 자본주의 현실의 특이성은 무엇일까?

비인간적 자본주의 

내가 보기에 세 가지 형용사로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적 재난 자본주의는 “비인간적 자본주의”, “유착하는 자본주의”, “통치하는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한국적 재난자본주의는 인간을 배제하는 자본주의다. 한국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들을 보면 모두 인간이 배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하철, 백화점, 다리, 그리고 수학여행 등 안전이 필요한 곳에 인간이 배제되고, 건물, 교통, 이벤트만 남아 있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선장과 승무원으로부터, 해경으로부터, 주류미디어로부터 배제되었다. 비인간적인 재난자본주의는 재난을 당한 인간에게 관심을 갖기보다는 재난의 수습과 재난의 재건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인간에 대한 배려와 돌봄, 정신적 패닉상태에 대한 진심어린 소통, 유가족들의 트라우마를 사회가 함께 나누어갖는 것 대신에 제도, 시스템, 재발방지에 대한 비인간적인 프로세스만 증폭된다. 그 결과 사회는 통제적이고, 인간은 더욱 피로해지고, 분열되며, 재난은 반복되고 결국 인간의 배제가 다시 반복된다. 보수 우파들과 지배 정치권력은 “좌파들의 시체장사”, “경제 불황 걱정”, “선거불똥”, “대통령비난” 운운하며 재난을 당한 인간을 배제하는데,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발생했던 대형 재난 참사의 담론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유착하는 자본주의 

“유착하는 자본주의”는 역설적이게도 리스크 상황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재난이 실제로 현실이 될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자본과 국가는 이러한 유착관계를 평소에 은폐하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이 말한 리스크 계산은 어떤 점에서 보면 재난을 예방하는 계산이라기보다는 이 유착과 커넥션을 은폐하는 데 이용된다고 볼 수 있다. 리스크 계산은 유착하는 자본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자본과 국가의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40여일 가까이 밝혀진 유착관계만 하더라도 이 참사가 구조적인 유착관계의 심화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커넥션 재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세월호는 한국 자본주의, 한국 사회가 어떻게 기형적으로 서로 유착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월호의 모든 불법행위들을 묵인하고 비호한 일선 관료들, 해양 관련 업무를 독점하고 있는 해양 전문 대학출신들의 인사독점, 해양재난과 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기업에 퇴직 후 버젓이 취업하는 해수부 관료들, 세모, 청해진해운, 다판다 인터넷쇼핑몰, 문진미디어, 노른자 쇼핑 등 문어발식 기업을 종교주의로 포장하여 사기업을 영역을 부풀리는 기업 형 사이비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이러한 사이비 종교주의자들과 유착된 정치인, 법조인, 연예인등, 그리고 시즌이 되면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알선해주기 위해 학교와 유착된 불량 비즈니스 이벤트 회사들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모든 재난은 이러한 유착관계 중 하나에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아니면 이 모두가 함께 연계되어 발생한다. “기업-관료-종교”의 유착관계가 한국형 재난자본주의의 리스크 관리를 위한 삼위일체라면, “경제-정치-미디어”의 유착관계는 재난의 담론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삼위일체이다. 한국에서 사실상 유착되지 않은 순수하고 투명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관계란 불가능하다.

통치하는 자본주의 

마지막으로 “통치하는 자본주의”는 국가가 재난자본주의를 통치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이다. 재난자본주의는 국가통치의 위기를 촉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국가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국가가 재난의 국면을 삼아서 국가 통치성의 필요성과 긴급성을 국민들에게 호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성은 재난의 책임을 통치의 권한으로 전환시키려 한다. 재난의 사태 해결을 시민사회에 맡기기보다는 강력한 국가 통치성을 강화하는 것이 한국적 재난자본주의의 특성인 것이다. 통치하는 자본주의의 강화는 제도와 매뉴얼에 의존하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시간이 또 지나면 재난을 해결하기보다는 인간을 배제하고, 유착을 심화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준다.
위험사회론을 주장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리스크와 재난을 구별한다. 리스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담론이고, 재난은 이미 일어난 것에 대한 담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와 자본은 리스크, 즉 ‘위험’에 대해 예측하고 계산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리스크 담론과 재난의 국면이 국가 통치성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권력 관계에 의해서 관리된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세월호 국면은 통치성의 국면이다. 세월호 참사는 통치성의 위기를 가져왔지만, 통치성을 행사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었다. 말하자면 리스트 담론은 통치성의 담론이며, 그래서 리스트에 대한 모든 관리를 통치 권력이 행사하려고 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KBS 세월호 참사 보도 관련하여 중립성을 지켜야 할 사장이 오히려 청와대에 유리한 보도 가이드라인을 보도국장에게 제시했다고 폭로된 것도 리스크담론, 재난담론을 통치성의 관점에서 국가가 관리하겠다는 생각에 기반 한다. 5월 19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도 재난의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통치성의 담론으로 기능한다. 해경해체론과 같은 강수들은 재난으로부터 국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겠다는 진정성의 담론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강력한 국면돌파용 카드로 제시되는 통치성의 언술이다. 리스트는 계산되고, 재난은 관리되는 것이 자본과 국가가 연합하는 통치성의 기본 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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