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다방]‘역외적 역량(commoning)’의 말들(41호)

2014년 6월 19일culturalaction

‘역외적 역량(commoning)’의 말들

크리스티안 마라찌, <자본과 정동: 언어 경제의 정치학>,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14

윤인로(문학평론가)

‘기업가’가 정치인이 되는 정치경제적 패턴의 발생. 또는, 친기업적인 인간들이 정치를 폐기하고 ‘거짓말’을 통해 주권적 협치를 행사하게 되는 과정. 그런 발생, 그런 과정을 마라찌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이른바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으로의 경향적 변화 속에서 이해했고 표현했다. 재합성되는 노동의 조건들․상황들에 대한 추상을 통해 경제조직의 변형을 일반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소통이 생산에 들어감으로써 도구적 영역과 소통적 영역의 이분법은 전복되었다.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은 고도로 소통적이며, 생산적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언어적’ 능력들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종류의 노동은 (통신과학기술의 장뿐만 아니라 순수한 감각-본능적인 단계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상징적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전제한다. 이것은 이제 일반화할 수 있는 능력, 언어가 허용하는 도구적-기계적 행위 그리고 데이터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의 존재가 바로 생산과정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48~9쪽) 1990년대 초반의 문장이며, 그런 한에서 선견(先見)의 사고이다. 노동은 더 이상 공장 안에 배치된 단선적인 도구가 아니며 잉여 노동을 명령하는 임금의 하수인이 아니다. 노동은 이제 고도의 소통적 ‘능력’, 곧 언어적, 지성적, 정서적, 정동적, 감각적, 관계적 역량으로 배양되며, 온갖 상징적 행위와 운동을 인지하고 파지함으로써 집계적이고 총계적인 데이터를 초과해 일반적으로 사고하고 표현할 수 있는 역량으로 고양되어 있다. 바로 그 역량이 곧 생산과정 그 자체로 된다. 자본은 그런 역량의 고도화 및 고양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두 발로 설 수 없게 된다.
위와 같은 사정을 마라찌는 ‘생산과 소통의 동시 발생’, ‘생산과 소통의 중첩 혹은 합선’, ‘경제의 언어학적 전환’ 등으로 압축한다. 소통에 의해 생산될 때, 아니 차라리 소통이 생산을 규정할 때 기존의 주권적 정치형태들은 위기에 처하거나 변형을 강제 당한다. “생산과 소통의 동시 발생은 개별적 이해관계와 집단적 이해관계 사이의 제도적 이행을 복잡하게 한다. 정당 체계, 노동조합, 또는 협조조합주의, 계급, 민족적․사회적 동일성에 기초한 여타의 집단 같은 대의적 매개체들은―처음부터도 그랬지만―점점 더 경직되어 간다. 각자 모두 자기 자신만을 대표한다.”(49쪽) 다시 말해 ‘역사적 대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된 합법적 합의와 협정의 산물, 곧 노-사-정의 대의적 협치 혹은 매개적 통치는 소통적 역량으로서의 노동에 의해 위기에 처하거나 변형을 강제 당한다. 그렇게 강제된 위기와 변형을 ‘유연 생산’이라는 노동의 재합성 기획으로 돌파함으로써 축적의 터전을 다시 다르게 다지려는 주도적 힘,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용자에게서, 곧 노사정이라는 형식적 사슬과 구속복을 실질적으로 끊고 찢는 기업가에게서, 다시 말해 정치인이 된 기업가에게서, 줄여 말해 거짓말하는 주권자에게서 나온다.
기업가 자신이 대의 민주주의에 전형적인 경제적 영역들과 정치적 영역들 사이의 틈을 뛰어넘는 통치의 주체, 즉 정치가가 된다. 기업가의 역설적인 “신뢰성”과 “특권”은 기업이 도구적 행위의 주체임과 동시에 소통적 행위의 주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는 (특히, 정치적인 계급 전체가 법적으로 기소되어 있을 때) 거짓말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진정으로 홉스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거짓말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활용되는 언어적-소통적 병기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재화가 정의상 “대의[재현]적인 재화”, 즉 세계의 이미지일 때 더욱 그렇다.(49~50쪽)
기업가를 신뢰하는 사회, 기업가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심각하게 토론되지 않는 사회, 자기-판매자들의 사회. 그런 사회 속에서 기업가가 받는 신뢰와 특권은 기업이 가치의 생산을 주관하는 힘이라는 데에서, 그 힘이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의 과정 속에서 도구적 행위와 소통적 행위 모두를 일체화시킨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기업이야말로 생산을 위한 힘을 통합․조정․관리하는 전위적 실험실이며 전방위적 최전선이다. 기업의 그 전위성, 그 전선 위에서 기업가와 정치가의 동시성․등질성이 전면적으로 관철된다. 기업가와 정치가의 일체화, 다시 말해 경제와 정치의 틈 없는 통합 속에서 정초되고 있는 통치의 매끄러운 평면. 이것이 오늘 여기의 정치경제적 실황이자 통치성의 주된 경향이다. ‘기업가-정치가’로서의 주권자가 닦아 놓은 통치의 평면 위에서, 도구적․명령적․위계적 관계를 조직하고 건설하던 기존의 모든 경직된 정치적 계급들은 더 이상 법적 보호막 안에 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법에 의해 기소되는 방식으로 대기 속으로 녹아내린다. 그 녹아내림, 그 유연성의 실황 속에서, 기업가-정치가라는 주권자는 경제와 정치의 통합적 총아가 되며 헤게모니는 그런 총아를 향한 총애의 형식으로, 그러니까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구축되며 관철된다. 이제 주권자는 말한다. 말하되 거짓말로 말한다. 거짓말 또한 말인 한, 거짓말 또한 언어적이며 소통적이고 생산적이다. 주권자의 거짓말이 생산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의’다. 대의라는 ‘세계의 이미지’다. 거짓말은 전문화된 지식의 가공과 배합으로 공식적 진실, 납득 가능한 진실, 견딜만한 진실, 안전한 진실을 생산하며, 그런 진실들의 공표와 인준 속에서 대의적 통치를, 진리관리의 체제를 일반화한다. 그때, 말하는 주권자의 그 말, 그 거짓말은 언어적․소통적 칼날이자 유혈적 병기(兵器)다. 그 병기는 주권자의 식기(食器)다. 우아한 식탁 위에 올라 온 더운 피와 살을 떠먹고 잘라 먹는 식기. “하청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주체들”(141쪽)의 피와 살, 떠 먹히고 잘려 먹히는 그 피와 살로 주권자는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한다. 그럴 때, 그 병기, 그 식기는 주권자의 발기한 생식기(生殖器)다. 벌떡 선 그것, 스펙타클 속에서 군림하는 말. 관계는 그런 가상 속에서, 환상 속에서, 후광 속에서 상상될 뿐이다. 그 상상은 그러나 유혈적이며 물질적인 힘을 행사하는 근거이자 그 결과이다. 이른바 ‘불통’의 뜻이 그와 같다.
마라찌는 하청의 세계를 채운 바로 그 피와 살이 이미 언제나 ‘산 노동’의 실재였음을, 내재적 역량의 민주주의였음을, 진정한 소통적․언어적․생산적 힘이자 부(富)였음을 인지한다. “민주주의의 바로 그 본질은 갈등들을 작동하도록 만들어, 이질적인 경험들의 출현을 위한, 그리고 지역적인 합리성들 간의 합리적인 중재가 성취될 수 있는 공간들의 창출을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 이러한 논리들은 사회의 피와 살이며, 사실상 사회의 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질적인 논리들이 공표되어, 자신들의 특수성을 잃지 않고 동등한 평면 위에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가 보다 평등한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 투쟁들과 조우들을 창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213쪽) 통치의 매끄러운 평면에서 내재적으로/역전적으로 발생하는 이질적이고 특수한 경험들의 구성체로서의 ‘동등한 평면’, ‘역외적 역량(commoning)’의 평면. 기어이 발굴되고 인지되는 말들의 힘에 대해, 그 역량의 실질에 대해, 그런 발굴과 인지의 줄기찬 역사 혹은 사고법에 대해 뜻있게 파생되는 말들이, 생산적으로 결렬하는 말들이 거듭 나누어질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 기대는 논구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기대가 2008년의 마라찌가 쓴 다음 문장들을 다르게 디디고 있는 것이면서도 그 문장들 너머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라고만 해 두자. “우리의 목표는 명확하다. 금융 시장에 대한 새로운 규칙들을 집단적으로, 그리고 아래로부터 부과하라. 공공 서비스, 교육, 복지에 투자하라. 새로운 에너지 부문에 공공 일자리를 창출하라. 고소득층에 대한 탈-재정화를 거부하라. 일자리와 사회 임금의 권리를 다시 요구하라. 자기-결정을 위한 공간들을 만들라.”(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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