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민의 사회적인것들] 정치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40호)

2014년 6월 5일culturalaction

정치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양기민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주로 이야기하는 이 칼럼에서, 지방선거를 앞둔 이번 달 만큼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떤 것을 ‘사회’로 어떤 것을 ‘정치’로 바라보는가는 해석이 다르고 기준도 모호하다. 이는 정치적인 것의 모호성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계속 주장하고 있듯이 사회적인 것이란 개념이 포괄적이고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반면 정치는 개념과 대상이 상대적으로 분명하다. 정치란 분명한 목표와 대상이 있으며 힘의 작용(권력)이 발생한다.

넓은 의미에서 정치는 ‘가치를 포괄적으로 분배하는 일련의 과정’이라 정의 할 수 있다. 좁은 의미로 흔히 정당을 기반으로 한 세력 다툼과 민주주의적 투표 행위를 포함한 결과 행위로 볼 수 있다. 사실 정치란 정당정치 이상의 일상생활에서도 발생 하는데, 초등학교 반장선거에서도 회사 안에도 정치는 존재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정치란 인간들 사이에 놓여 있으며, 관계로서 성립된 것”이라 말한다. 인간 간의 관계로서 이뤄진다는 지점에서 ‘정치’는 ‘사회적인 것’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사회는 삶을 기반으로 한다면 정치는 (정치인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선거와 같은 어떤 특정한 시점 및 국면, 상황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사회와 정치의 명확한 관계설정은 사회학자와 정치학자 간에 해야 할 일이지만, 정치와 사회의 관계를 통해 여러 질문들을 구성해 볼 수 있다. 사회에서 정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정치가 사회를 어떻게 구성하는 것인지, 정치와 사회는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여러 질문들을 던져 볼 수는 있다. 이번 원고에서는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들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이 목표이다.

사회적인 것의 추상성과 불명확함에 비해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면서 본능적으로 ‘정치’가 중요하다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선거에서부터 회사에서 승진 등등 살아가다보면 정치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희망과 좌절, 위기와 공포 등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는 말이 잘 못된 번역이었고 사실 인간은 정치적동물이라는 표현을 했다는 점을 볼 때, 정치는 사회를 우선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편’을 가르는 정치적인 것

“단속사회”의 저자 엄기호의 표현에 의지하자면, 정치는 ‘편’을 가르는 것이다. 가시적으로 편을 나누며 참여하는 선거는 국민의 의무이기까지 하다. 선거란 ‘정치’의 편을 가르는 전면전인자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 이벤트이다. 선거에서는 투표를 하느냐/안 하느냐, 누굴 찍느냐의 개인의 선택들을 집단적으로 계량화되어 비교를 통해 결과로 산출한다. 실제로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집단(곧 누군가의 편)의 승리와 패배 결정이 중요하다.

개인의 투표 행위는 소중하고, 개인들이 모인 결과는 집단화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한 표 한표가 모두 소중하다고 말하며, 이를 개인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반영한 것도 집단의 통일 된 의견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선거란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으로 주어진 것 중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정치가 아니라 소극적인 정치 행위일 뿐이다. 국민의 정치 권리를 투표의 권리만 강조하고 신비화하는 것은 정치 행위를 소극적으로 형태로 제약하는 효과를 가진다. 정치인들이 보기에 유권자란 사실 정치 소비자의 다른 표현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단지 정치를 소비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에 대한 의견을 내고 토론과 지지하는 후보를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일도 엄연한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선거철에는 이러한 정치(인)에 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표현하게 되는데, 이는 투표보다 중요한 정치적 행위이자 생산의 과정이다. 특히 개인 SNS의 발달로 인해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요즘은 정치가 일상화되어 있고, 사회적 관계 속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정치적인 것은 이미 사회적인 안에 포함된다.

특히 선거 때만 되면 반복되는 이상한 현상이 있다. SNS 분위기와 실제 투표 결과가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도 그랬다. (전라도 집안에서 태어나 특히) 내 주변에서는 한 결 같이 비슷한 성향의 후보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마주칠 때마다 보수 성향의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이 SNS를 상대적으로 안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타임라인에는 보수 성향의 후보를 지지한다는 온라인 친구가 너무 없다. 선거의 결과를 통해서 볼 때 나의 온라인 사회는 왜곡된 사회이고, 나의 사례를 보면 소셜 네트워크는 말 그대로 가상의 사회적인 것-소셜(Social)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는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사회를 재구성하는 힘에 가깝고 그 힘들이 왜곡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신 곁에 누가 있습니까

선거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의 인간관계의 폭이 지나치게 좁은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실제로 사회성이 부족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세대적으로 계급적으로 지역적으로 진보성향의 사람들만 알고 만나며 좁은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앞선 엄기호의 책에 나온 표현을 차용하면,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곁’이라고 한다면, 내 곁엔 정치적으로 같은 편인 사람들 밖에 없다. 이게 문제인지, 아닌지의 판단을 잠깐 보류하려 한다. 오히려 내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점은 정치적으로 내가 분명한 편에 서 있었기에, 다른 정치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인지, 내가 일부러 안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인지 궁금하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 부동층으로 분류되지 않는 층을 제외하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어떤 어르신과 그리고 나는 다르지만 서로 ‘고립’되어 있고 각자의 사회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 정치는 이러한 삶을 이어주지도 않고 나 역시 정치적으로 이러한 삶이 사실 아직까지는 불편하지는 않다. 다만 그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려 할 뿐이다. 정치를 통해 관계를 이해하기보다는 단절을 가져오며, 정치는 수많은 단절 속에서 서로가 타인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는 서울시장 선거이다. 여론조사에서 정몽준 후보를 일정 정도 이기고 있다는 예측 때문인지 이번 박원순 시장의 선거운동은 조금은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반면 정몽준 후보는 상대적으로 조급했는지 무리한 발언과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활동들을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유권자들 사이의 간격을 그러냈다. 대표적으로 그 아들이 ‘미개인’이라고 하며 구분하거나, 서울시의 협동조합 사업을 당선 되면 “그 딴 거 안 하겠다”는 등의 발언은 철저하게 자신과 상대방을 분리할 뿐이다. 대기업의 후계자로서 살아온 정몽준 후보는 정치를 하려는 것이지, 같은 사회를 살아가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박원순 시장의 슬로건 “당신 곁에 누가 있습니까”는 정치적 선거용으로 효과적인 구호인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선거 이후의 시정을 생각할 때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정치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전환

정치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서로의 편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선거란 승/패가 분명한 승부이다. 투표가 끝나면 정치는 어떤 정치인에 손에 맡겨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를 망각하거나 혐오한다. 정치가 공정한 승부로 끝났다면 승패를 인정하고, 사람들이 만날 수 있어야 할 다른 공통의 ‘사회’가 있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초기부터 ‘사회통합’을 이야기하였지만, 정치적인 접근으로서는 사회는 통합될 수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원래 하나의 사회란 존재하지 않기에 통합이란 불가능한 개념일지도 모른다.

반면 사회는 곁에서부터 출발한다. 지금 당신의 곁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하면서부터 사회는 구성되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각자가 취향이나 조건에 따라 선택적이거나 혹은 생득적으로 여러 방식으로 무리 지으면서 여러 작은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개인은 서로 다른 사회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사회는 상호 의존적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같은 편이 아니지만, 서로 만나지 못하는 곁과 곁들은 어떻게든 이어지게 되어 있고, 이어야만 한다. 사회는 이미 통합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연결로 이뤄진다.

결국 이번 박원순 시장의 슬로건처럼 당신 곁에 누가 있느냐와 같은 주변을 확인할 수 있는 질문들이 서로 이어질 때, 정치적인 것들을 넘어 ‘사회적인 것’들로서 새로운 관계가 생성된다. 정치적인 것이 관계를 단절시킨다면 사회적인 것들은 연속적이고 지속시킬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제 정치적인 선거가 끝나면, 같은 편과 함께 삶을 목표로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다른 사회)과도 어떻게 서로 엇갈리더라도 만날 수 있는 전환과 기획이 필요하다. 박원순 시장이 정치가가 되기보다 사회운동가로 남아 시정을 운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우리 사회는 그 동안 결국 정치적인 것들에 과잉 결정되어 의존하여 왔다. 사회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들은 포함된다. 정치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들을 넘어서는 사회적인 것들이 구체적으로 출현되거나 생산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각각의 편들로 나뉘고 조각나, 같이 살고는 있지만 서로 살아갈 수 없는 불편한 사회가 지속될 뿐이다.

p.s 그래서 선거 이후 박원순 시장이 정치를 넘어서 사회적인, 개인이 아닌 사회로 다시 모일 수 있는 정책들을 펼쳐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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