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014년 6월, 거리응원은 증거인멸이다!(40호)

2014년 6월 5일culturalaction

[편집자주] 우리에게 월드컵은?

이제 곧 전 세계인의 축제라 불리는 브라질 월드컵이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월드컵은 2002년의 4강 신화, 거리응원, 태극기 패션 등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서 강렬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거리응원 문화는 대기업의 자본과 결합하면서 상업화되었습니다. 브라질 월드컵 반대시위, 피파(FIFA)의 비리와 같이 월드컵 자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많습니다. 특히 이번 브라질 월드컵은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작되어 거리응원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의견 또한 분분합니다. 이번 문화빵에서는 이런 월드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월드컵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다뤄보았습니다.

 

(1) 2014년 6월, 거리응원은 증거인멸이다! / 정희준(동아대 교수)

(2) 월드컵, 국가와 자본과 피파의 패스플레이 / 정윤수(스포츠 평론가)

(3) 세계인의 재앙이 된 월드컵 / 박선영(문화연대)

 

2014년 6월, 거리응원은 증거인멸이다!

정희준 / 동아대 교수

비정한 공동체

출퇴근 시간 버스정거장에 가보자. 버스가 오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차문을 중심으로 반원이 만들어진다. 줄이고 뭐고 없다. 자신의 어깨를 슬쩍 들이밀고 옆 사람의 진로를 모른 척 자르며 조용하면서도 세심하게 출입문을 향한 순위다툼을 벌인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활주로를 미끄러져 게이트에 다가가 “딩동~”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일어선다. 좁은 문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내리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맨 뒤의 사람까지 몽땅 일어선다. 어떤 이는 의자에서 빠져나오지 못 한 채 엉거주춤 서서 기다린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올해 초 세 모녀 동반자살 사건이 있었다. 이후 세 모자 동반자살도 있었고 부부의 자살도 있었다. 이들은 세상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이들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표현하면 이들은 자신의 국가와 이웃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스스로를 포기한 것이다. 즉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 못한다. 서로에게 신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부터 먼저 살고 보자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 무역 교역량 세계 십 몇위니, OECD 가입국이니 떠들어 대지만 공동체의 측면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후진국이다. 그 결과가 바로 세계 최고의 독보적 자살률이다.

신용불량에 빠진 젊은 엄마가, 장애를 가진 자식을 가진 부모가 왜 그들의 자녀를 데리고 갔을까. 왜 두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에 올라 큰 아이를 먼저 던지고 작은 아이는 안고 뛰어내려야만 했을까. 국가는 물론 이웃마저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움은커녕 남겨진 자식들이 이웃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친구들에게 왕따 당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데리고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 잔인해져 갔다.

한국사회는 비정한 사회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의지해야 할 공동체를 우리 스스로 파괴했다. 적나라한 약육강식의 사회가 됐다. 약한 자는 고기가 되고 강한 자는 이를 씹어 삼킨다. 결국 약한 자를 희생시켜 강한 자가 다 가져가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날치기 통과된 노동악법과 곧 이어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 경제위기는 이 사회에서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마저 없애 버렸다. 상처받고 아픈 자에 대한 배려도 사라졌다.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그때부터 한국의 자살률은 박차고 치솟기 시작했다. 이제 공동체는 붕괴했다. 한국사회의 자본주의는 지구상 자본주의 중에서 가장 저질 자본주의이다.

‘스폰서 응원단’인가 ‘축피아’인가

저질 자본주의는 저질 응원단을 불러온 것인가.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로 인해 한국사회가 대폭발 하던 그때 젊음과 승리의 상징으로 등장한 집단이 바로 ‘붉은악마’다. 그러나 이들은 거대한 성공과 함께 곧 ‘스폰서 응원단’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상업주의 논란에 빠진다. 

2006년만 해도 KTF와 현대자동차로부터 각각 3억8000만 원, 네이버로부터 1억 원의 후원금을 거둬들였고 각종 응원도구와 셔츠 판매로 1억여 원을 벌어들였다. 거의 10억 원에 달하는 돈이다. 응원단의 돈벌이 논란 때문에 2006년 ‘신 붉은악마 선언’을 발표하고 “영구적으로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겠다”고 밝혔음에도 이후로도 기업후원을 계속 받았다. 

2010년에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후원금 액수는 밝히지 않았지만 현대기아차, KT, 홈플러스 등의 손을 꼭 잡고 그들의 마케팅을 도왔고 2014년 이번에도 KT, 홈플러스 등과 함께 마케팅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역사는 한마디로 스폰서와의 역사다. 또 배신과 싸움의 역사다. 2002년의 스폰서였던 SKT와 적이 된 후 경쟁업체 KT를 스폰서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윤도현과는 응원가를 가지고 치졸한 원조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붉은악마는 성숙한 사회라면 한마디로 말해 사라져야 할 응원단이다. 8년 전에도, 4년 전에도 시끄럽더니 올해도 죽지도 않고 또 왔다. 이번에도 새 응원가를 들고 왔다. 5번째 앨범이란다. 이전 것 중에도 좋은 게 많은데, 또 외우기도 쉽지 않은데 왜 자꾸 월드컵 때마다 새 응원가를 들고 나오나. 왜 티셔츠를 매번 새로 만들어 우리에게 사라고 하나. 우리가 그걸 모를 거 같나. 돈벌이인 것을. 월드컵이나 올림픽 때마다 신기술 TV가 등장해 우리를 유혹하듯 신기술과 새로운 상품은 그 자체가 마케팅이었다. 

또 붉은악마는 “과도한 관심이나 비난은 사양하겠다”며 “초창기 때처럼 소수 서포터 단체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던데 소수 단체로 가더라도 기업후원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스폰서 응원단’의 본 모습을 숨기기 위해 과도한 관심을 사양하겠다는 것인가. 붉은악마는 축구발전을 위해 ‘붉은악마 축구발전기금’을 운영하고 이쪽으로 기업후원을 지정 기탁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상업주의 논란을 피하기 위한 면피용 사업일 뿐이다. 축구협회가 해야 할 일을 도대체 왜 응원단이 나서서 하는가.

붉은악마는 ‘축구발전을 위한다’는 이야기를 걸핏하면 한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대표 감독 선임 문제나 K리그 승부조작 때 등 한국축구의 고질적 문제가 불거진 사건이 터지면 항상 침묵했다. 이는 대한축구협회와의 유착관계 때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그러한 이해관계 속에 혜택을 받는 ‘축피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리응원: 재벌의, 재벌에 의한, 재벌을 위한

이 지구상에 어느 응원단이 이렇게 돈 많이 드는 응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나라의 거리응원이 우리처럼 조직적이고 군사주의적이면서도 상업적이고 판촉물 넘치는 응원을 하는지 모르겠다. 또 이렇게 연예인과 마케팅이 뒤범벅이 된 거리응원이 어디에 있나. 젊고 예쁘고 노출 심한 여성들을 카메라 앞에 앉히는 민망한 응원이 또 어디 있을까. 참고로, 한때 많은 이들이 붉은악마와 일본의 울트라니뽄을 비교했다. 하지만 그들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때만 존재했을 뿐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일본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거리응원은 돈벌이를 위한 도구이다. 4년 전 월드컵 때 확연해진 것이 있다. 강북인 서울광장에서의 응원이 시들해지고 강남에 둥지를 튼 새로운 응원공간들이 더 인기를 얻은 것이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의 마케팅 시도가 봉쇄되자 현대자동차, SKT, SBS 등 대기업들은 반포로, 코엑스로, 올림픽공원으로 진출해 자기들만의 응원공간을 만들었다. 이젠 응원조차 강남이다. 사실상 응원을 빙자한 마케팅 공간이다. 붉은악마도 그렇지만 우리도 이제 재벌이 없으면 응원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응원할 때조차 소비자로 포획될 뿐이다.

우리는 1970년대 흑백텔레비전 시절,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박스컵 축구와 고교 야구를 보며 열광했다. 그때의 응원이 거대한 태극기와 카드섹션, 휴지폭탄이 난무하는 응원보다 못했는가. 그때의 함성이 연예인들이 엉덩이를 흔들며 노래하는 가운데 빨간색 셔츠를 입고 외치는 함성보다 못한가. 그때는 한 밤 중에 치킨, 맥주 배달이 없었어도, 아무런 야식이 없었어도 밤을 새워 축구를 보며 응원했다. 혼자 보는 줄만 알았던 그 새벽에 동네 이웃의 떠나갈 듯한 함성을 들으며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이게 진정한 하나됨이다.

누가 지금 거리응원을 이야기 하는가!

월드컵이 다가왔으니 함께 하나가 되자고 한다. 그대는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버려두고 하나가 될 것인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한 번 물어보자. 지금 그 희생자와 유가족 빼고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 있는가. 우리는 이미 다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가끔일지라도 그들을, 세월호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고통스러워야 할 의무가 있다. 아직 조금 더 그들을 추모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야 세월호 참사와도 같은 어처구니없는 후진국형 사고는 예방될 수 있다. 우리가 좀 더 고통스럽고 조금 더 이야기 해야만 이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

그들 상당수는 아직도 진도를,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바다 속에 열여섯 명이나 남아있다. 그들은 사는 게 힘든 정도가 아니라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우리 이웃들이다. 떠나간 아이가 당장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 아직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 내 아이는 찾았지만 아직도 실종자를 찾지 못하고 진도체육관에 남아있는 이웃을 위해 진도로 또 내려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으로부터의 위로 덕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월드컵이라고 그들을 뒤로 하고 거리응원으로 뛰쳐나가는 순간 그들은 망망대해에 홀로 남은 외로움과 절망감에 휩싸일 것이다. 단원고 아이들도 그러지 않았는가. “월드컵이 오면 우리를 잊을 거잖아요.” 이 아이들은 우리가 결국 자신들을 버리고 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 아이들의 예상대로 과연 우리는 그들을 버릴 것인가.

거리응원은 증거인멸이다!

지금 세월호 관련하여 많은 의구심은 물론 의혹마저 꼬리를 물며 드러나고 있다. 한 전문가는 이러한 상황임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해양경찰을 폐지하기로 한 것은 사실상 증거인멸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 6월 4일은 선거일이다. 여당이 이기면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는 흐지부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13일부터는 월드컵이다. 우리가 거리에 나가 ‘대~한민국’을 외치는 순간 희생자 가족들은 좌절에 빠질 것이다. 그 순간은 세월호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지워지는 순간이 될 것이다. 

거리응원은 증거인멸이다. 월드컵에 열광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안산의 우리 이웃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안길 것이다. “대~한민국”은 결국 또다른 세월호를 부르는 비극적 함성이 될 것이다. 개최국인 브라질 국민들도 보이코트 하는 월드컵 때문에 우리가 세월호를 저버릴 것인가. 그 순간 대한민국은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 비정한 사회가 될 것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의 <정희준의 어퍼컷>과 공동게재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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