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로운 덕후의 우울]잉여로운 덕후의 슈퍼 잉여킹 생활(39호)
잉여로운 덕후의 슈퍼 잉여킹 생활
최지용
hohobangguy@hanmail.net
오랜만에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 앨범을 틀었다. 피아노 선율 아래서 가끔씩 둥둥 거리며 제 역할을 하는 베이스가 가여웠다. 끊어질듯 말듯 이어지는 소리는, 말하자면 인생 같은 것이다. 아무리 소리를 내어도 존재감은 희미하다. 쉴 새 없이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거슬려서 이내 음악을 껐다.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마음과, 긴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것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그래봤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다. 학교를 며칠 땡땡이 치고 여행이나 다녀올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우선 통장 잔고부터 확인해 보아야 한다. 기분전환에도 돈이 든다.
문득, 시민사회운동을 하겠다고 처음 활동을 시작하던 때가 생각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의 문을 열고 인권영화제 팀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했다. 지금도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지금보다 더 어렸던 그때, 나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오히려 더 용감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치기 섞인 열망뿐이었음에도 그것이 모든 행동의 동력이 되어주었다. 사람들과 관계 맺는 요령도 없었고, 내 지나친 열정이 다른 사람과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렇게 부딪히고 상처받고 넘어지면서,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확인해가는 새에 어느덧 5년이 훌쩍 지났다.
그렇게 2014년의 한국 사회에 나는 도착했다. 세상은 전보다 더 나아지기는커녕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고, 나의 개인적인 삶 또한 온전치 못하다. 겨우 5년의 경험을 가지고 무얼 그러느냐고 할지 모르나, 문제는 나와 우리 세대에게는 성공의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실패 속에서 삶을 겨우 부여잡고 있는 것뿐이다. 선배 세대들에겐 87년의 찬란한 훈장이 빛나고 있겠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삶을 설명할 그 어떤 경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망했다.’ 우린 망했다. 아니 우리까지는 아니어도 ‘나’는 확실히 망했다.
그러나 ‘망했기’ 때문에 일말의 희망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망했기 때문에 우리(또는 나의) 행동은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잃을 것이 없어야 강해진다.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별로 좋아하는 말이 아니긴 하다. 하지만 그 말대로, 태어난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기에 나의 행동은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단지 실패한 것뿐이다. 살면서 겪을 수많은 실패 중에 한 번을 더 한 것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우울에서 벗어나 또다시 무언가를 하고, 다시 실패를 할 것이고, 다시 아파하다가, 또 무언가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망했으므로 앞으로의 삶에서 몇 번의 실패를 더하든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힘이 든 것은 힘이 든 것이다. 앞으로 한동안 나는 무언가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에 다시 마음속에 불을 지피고 다시 실패를 하기 위해서 일을 시작할 것이다. 문제는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간지나게 실패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잉여들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규범이다.
실패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