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로운 덕후의 우울]잉여로운 덕후의 슈퍼 잉여킹 생활(39호)

2014년 5월 22일culturalaction

잉여로운 덕후의 슈퍼 잉여킹 생활

최지용

hohobangguy@hanmail.net

 5월에 태어났다내가 말띠이고 올해가 말의 해니까만으로 꼬박 스무네 해를 산 것이다며칠 전 ()여자친구에게 이별통보를 받았다주말동안 집에만 있었다세월호 집회에는 나가지 않았다잠깐 옥상에 올라 담배 두 대를 태우며 자전거 기어를 1단에 놓고 느리게 경사를 오르는 사람을 구경한 것을 빼고는 방구석에서 열과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누워 지냈다.

오랜만에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 앨범을 틀었다피아노 선율 아래서 가끔씩 둥둥 거리며 제 역할을 하는 베이스가 가여웠다끊어질듯 말듯 이어지는 소리는말하자면 인생 같은 것이다아무리 소리를 내어도 존재감은 희미하다쉴 새 없이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거슬려서 이내 음악을 껐다.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마음과긴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것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그래봤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다학교를 며칠 땡땡이 치고 여행이나 다녀올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우선 통장 잔고부터 확인해 보아야 한다기분전환에도 돈이 든다.

문득시민사회운동을 하겠다고 처음 활동을 시작하던 때가 생각났다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의 문을 열고 인권영화제 팀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했다지금도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지금보다 더 어렸던 그때나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오히려 더 용감했다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치기 섞인 열망뿐이었음에도 그것이 모든 행동의 동력이 되어주었다사람들과 관계 맺는 요령도 없었고내 지나친 열정이 다른 사람과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그렇게 부딪히고 상처받고 넘어지면서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확인해가는 새에 어느덧 5년이 훌쩍 지났다.

그렇게 2014년의 한국 사회에 나는 도착했다세상은 전보다 더 나아지기는커녕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고나의 개인적인 삶 또한 온전치 못하다겨우 5년의 경험을 가지고 무얼 그러느냐고 할지 모르나문제는 나와 우리 세대에게는 성공의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끊임없는 실패 속에서 삶을 겨우 부여잡고 있는 것뿐이다선배 세대들에겐 87년의 찬란한 훈장이 빛나고 있겠지만우리에겐 우리의 삶을 설명할 그 어떤 경험도 존재하지 않는다한마디로, ‘망했다.’ 우린 망했다아니 우리까지는 아니어도 는 확실히 망했다.

그러나 망했기’ 때문에 일말의 희망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망했기 때문에 우리(또는 나의행동은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잃을 것이 없어야 강해진다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별로 좋아하는 말이 아니긴 하다하지만 그 말대로태어난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기에 나의 행동은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단지 실패한 것뿐이다살면서 겪을 수많은 실패 중에 한 번을 더 한 것뿐이다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우울에서 벗어나 또다시 무언가를 하고다시 실패를 할 것이고다시 아파하다가또 무언가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어차피 망했으므로 앞으로의 삶에서 몇 번의 실패를 더하든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물론 힘이 든 것은 힘이 든 것이다앞으로 한동안 나는 무언가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가까운 시일에 다시 마음속에 불을 지피고 다시 실패를 하기 위해서 일을 시작할 것이다문제는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간지나게 실패하는 것이다그것이 우리 잉여들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규범이다.

실패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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