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석의 가르치다-배우다] 자기계발과 인문학적 소양 (39호)

2014년 5월 22일culturalaction

자기계발과 인문학적 소양

강정석 / 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장, 영상원 강사

신세계그룹의 정용진 부회장은 얼마 전 연세대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주로 증시 현황을 보도하는 케이블채널에서 우연히 정용진 부회장의 강연을 볼 기회가 있었다. 2천 명이 모일 정도로 강연은 대성황이었다나름대로 열심히 강연을 했고시까지 낭독할 정도로 청년들에게 정말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려 애쓰는 흔적이 역력했다.

정용진 부회장의 강연은 신세계그룹에서 진행하는 <지식향연뿌리가 튼튼한 청년 영웅강연 프로젝트의 서막이었다. <지식향연>은 전국 10개 대학을 돌아다니며 1만 2천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인문학 중흥을 통하여 전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든다.’가 프로젝트의 비전이며, ‘인문학 중흥인간과 문화에 대한 지식과 지혜 전파가 프로젝트의 미션이다또한 이 프로젝트는 20명의 인문학 청년 영웅도 뽑는다무려 영웅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주목하자인문학 청년 영웅이 된다면, ‘인문학의 중심지를 직접 방문하는 그랜드 투어 기회’, ‘신세계 지원 시 가산점’, ‘소정의 장학금이 주어진다고 한다.

정용진 부회장이 주도하에 이루어진 신세계그룹의 인문학 중흥 프로젝트인 <지식향연>을 우연히 접하면서기업이 바라는 인재상의 어떤 변화가 느껴졌다핵심은 열심히와 제대로의 차이인 것 같다이제 자본가는 청년들에게 열심히‘ 사는 건 기본이고 제대로‘ 사는 것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제대로 살아야 뽑아준다는 것이다즉 취직하기 위해 제대로‘ 살아야 한다그것을 측정하는 지표가 바로 인문학적 소양이다.

오찬호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에서 현재 대학생 20대들이 경쟁과 차별을 내면화한 자기계발적 주체임을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밝히고 있다. KTX 여승무원은 원래 비정규직으로 채용된 것이기 때문에이들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투쟁을 날로 먹는 것이라 표현하며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사회적·구조적 차별에 찬성하는 현재 대학생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그런데 정용진 부회장의 강연을 듣고 있자니이러한 영혼 없는’ 기계적인 자기계발은 이제 기업에서도 선호하지 않는 것 같다자본가가 무려 20억을 투자하여 인문학의 가치를 찬양하고발 벗고 직접 강사로 나서 더 이상 기계적인 스펙 쌓기에 열중하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성찰하며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라고 주문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의 채용 문화가 갑작스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여전히 경쟁적인 스펙쌓기는 지속될 것이며청년들은 취직을 위해 부단히 자기계발에 임해야 할 것이다여기에 덧붙여 청년들은 이제 여러 고전들을 탐독해 나가면서 그 이름도 찬란한 인문 영웅이 되어야 한다강연에서 정용진 부회장이 다른 책보다 고전을 읽으라고 권유한 것처럼앞으로 청년들은 취직을 위해 한 장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거나 무척이나 지루한 여러 고전들을 붙잡고 씨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물론 이러한 씨름은 굉장한 인내심과 물리적인 시간을 요청하기에요점만 간단히그리고 빠르게 여러 개념들을 이해시켜주는 일종의 참고서가 필요하다최근 인문학 개론서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것도, TED같이 짧은 러닝타임에 몇몇 핵심적 개념들을 응축하여 설명하는 강의형식의 등장도 이러한 맥락에 있지 않을까.

신세계그룹의 <지식향연>은 최근 불어온 인문학 열풍의 어떤 지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아름다운 시를 인용하고,소설의 멋진 구절을 가져오며철학자의 속 깊은 사유를 나름대로 설명하는 것도 스펙이다누구나 자기계발을 하며 시간을 쪼개어가며 열심히 살아가기 때문에이제는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 제대로‘ 살아야만 취직이 가능하다그것이 경쟁상대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차별화 요소가 된다결국 제대로 살려면다른 말로 해서 신세계그룹같은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하려면경쟁적인 자기계발은 기본으로 행함과 동시에 인문학도 열심히공부해야 하며이를 통해 나름의 관점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를 성찰해야 한다이럴 때 인문학은 취직을 위한 일종의 도구가 되어버린다물론 정용진 부회장은 강연을 통해 청년들에게 취업을 위한 인문학 공부를 하지 말라고 절절하게 부탁했다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그는 같은 강연에서 신세계그룹부터’ 본격적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채용 시 고려하겠다고 말하고 있다아마도 전자는 립서비스에 불과하며후자가 진심일 것이다그렇다면우리는 자기계발의 일부로 전락해버린 인문학을 인문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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