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를 이해하기 위하여]가족사진(38호)

2014년 5월 9일culturalaction

가족사진

임효진 (reykjavik59@gmail.com)

 친척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서로가 조금씩 닮은 걸 보고 있으면 갑자기 무지 생경한 기분이 든다. 얼굴, 체형은 물론이거니와 말투와 목소리마저 닮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삼대가 모여 앉은 광경은 이제 KBS 1TV 드라마가 아니면 구경할 기회가 거의 없지 않은가) TV든 현실이든 그 분위기가 매번 좋을 수는 없지만 어떤 순간들엔 대략 난감할 정도로 벅차오르기도 한다.
 언젠가 친한 친구가 내게 경고하듯 쏘아붙인 말이 생각난다. “가족인 듯 대하지만 않으면 되.” 이건 우리 관계에서의 충고이자 모든 문제의 해답인양 보였다. 이상적인 유대를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배려가 빠진 관계를 가족이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말이다. 아르바이트생들은 이제 ‘가족 같은 분위기’와 같은 문구에 더 이상 속지 않으며, ‘가족’과 관련된 인용구들은 한국사회의 해묵은 불편함의 또 다른 이름처럼 쓰인다.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귀향 퍼포먼스는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감정노동이라는 사실과 지구가 아무리 ‘촌’단위로 작아지는 스마트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가족 간의 적당한 물리적 거리감은 서로의 행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미즈넷’의 결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한다.
 ***
 외할머니의 입술이랑 엄마의 입술이 똑같고 엄마는 이모들과 판박이이고 첫째 이모와 그 집 큰 오빠의 얼굴형이 닮았고 이모부와 조카가 닮고 외할아버지와 내가 웃는 모습이 같다. 머리가 휑한 이모부와 아직은 머리숱 걱정 없는 갓 스무 살이 된 사촌동생이 동시에 머리를 긁는 그런 순간에 나는 중학교 생물수업시간을 떠올린다. 유전자는 이기적이고 또 동시에 얼마나 강력한지. 유원지에서 아주 오랜만에 외가친척이 모두가 모였던 날, 지나가는 청년에게 카메라를 맡긴 뒤 이열 종대로 얼굴을 맞대고 나란히 섰다. 그도 우리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그들 중에 아니 그들의 조합 속에 내가 있고 내 미래도 있다. 가끔 무섭다. 미스코리아 뺨치게 예뻤던 이모가 살이 아주 많이 찌고 영원히 청년일 것 같았던 사촌오빠가 아이의 아빠가 되어 이상하게 점잔을 뺄 때, 나이를 먹는 일이 여전히 싫은 나는 앞선 사람들의 지금을 구경할 때면 가슴께가 뻐근해져온다. 물론 자신의 대학교 입학식 날 태어난 조카가 어느덧 어엿한 청년 백수가 되어 ‘취(직)(시)집’이야기에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걸 보는 기분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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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 자주 보던 사람이 아닌데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때 나오는 인사들은 예상 가능한 말들로 시작한다. 그리고 대게 진심이든 아니든지 간에 ‘다음에’ 꼭 보자는 두루뭉술한 약속을 잡고 각자 가던 길을 가면 그만이다. 상황이 좀 애매해지는 건 아침저녁으로 혹은 어제도 봤고 내일도 볼 아주 친밀한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는 순간이다.
 엄마를 집이 아닌 곳에서 약속 없이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오늘 아침 거실에서 스치듯 보았던 옷자락, “이거 너무 덥지 않겠어?”라고 되물었던 외투를 가지런히 접어 손에 쥐고 조금은 심란한 얼굴로 걷고 있는 사람. 우리 엄마.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과 커피숍 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주 멀어서 감히 부르지도 못할 거리에 놓인 것처럼 굳어 있었다. 한동안 맴돌았던 그때의 낯선 표정으로부터 나는 적절한 거리감, 혹은 배려를 익혔다.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기 위해서 거실에 놓인 가족사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들을 하나씩 각자의 마음속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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