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민의 사회적인 것들]“국가, 정부, 사회적인 것들”(38호)

2014년 5월 9일culturalaction

“국가, 정부, 사회적인 것들”

양기민/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sis@noridan.org

모두 힘든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회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잠시 생각했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정보와 이야기가 쏟아지며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라 섣부른 의견과 해석을 더하기 어려웠다. 일부 보수 논객의 말도 안 되는 의견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세월호 글들을 읽으면서 분노하기도 반성하기도 하였다.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부실을 보여준 파국의 증거이기 때문에 어떤 비판과 반성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정부는 어쩌면 우리는 어린 청춘 하나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다. 미국인에게 911 테러, 일본인에게는 후쿠시마 방사능 사건처럼 한국 사회에서 흉터처럼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 같다. 다행히 세월호 침몰 이전과 이후, 대한민국이 새롭게 변해야만 한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필자 역시 이후의 여러 생각의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세월호 이전의 생각

“국가, 정부, 사회적인 것들”은, 세월호 사건 이전부터 줄곧 고민해 왔던 주제였다. 반바닥 정도 원고도 미리 메모하고 있었다. 예전 적어 놓았던 글에선 조금씩 잊혀가고 있는 다른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했다. 얼마 전 복지 수혜를 받지 못해 자살한 세 모녀의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세 모녀 자살 사건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들의 죽음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고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라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책임이라 볼 수 있을까, 국가의 책임인가, 정부의 책임인가, 혹은 사회의 책임인가.
비극적이지만 당시 결론은 세 모녀 사건은 국가의 책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복지국가’의 비전에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시장 국가체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명확한 합의는 이루지 못했다. 다만 연민할 뿐이다. 어쩌면 푸코의 표현처럼 근대 국가 체계는 가난을 방치하며 전시를 통해 통치에 이용하기도 한다. 사회를 작동하기 위해서는 소외계층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지만 방치하는 것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지정책을 확대한다고 공약했던 ‘정부’에게는 책임이 있다 생각했다. 사건 이후 정부는 이미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복지 정책이 있었으나, 단지 전달체계에 오류가 있었다는 변명 같은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정부의 후속조치는 사각지대 복지 대상을 더 찾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부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가 나타날 때마다 해결책으로 종종 관행적으로 제시되는 개념이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자는 결론이었다.

누군가의 책임을 사라지게 하는 ‘사회적인 것들’

‘사회적인 것들’이란 칼럼을 쓰는 내 관심은 사회적 안전망이란 담론에서 지칭되는 ‘사회적’이 란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다. 주로 시민 사회 측에서 이러한 제안을 자주 하는데, 이때 시민 사회의 역량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로 활용된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표현이 오히려 책임의 주체를 사라지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고 가정했다. 특히 ‘사회적’이란 용어를 쓰면서 국가 혹은 정부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을 혹은 정부가 책임지어야 할 문제를, ‘사회’라는 불투명한 주체의 공동책임으로 만들어버리는 효과가 있다고 말하려 했다. 사회적인 것이란 개념이 문제의 본질과 책임을 회색시키는 역할에 동원되며 소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출처 : 앤하위키 미러

국가, 정부, 사회의 각각의 역할

흔히 우리는 국가와 정부를 혼동한다. 주로 국가는 정부라는 실체가 대리하고 있으며 상징적인 존재이자 추상적 대상으로 막연하게 인식하였다. 그래서 국가보다는 정부에게 실질적 요구를 하는 것이 효과가 있고,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 모녀의 자살도 국가에게 요구하기보다는 정부가 책임져야 할 문제이거나 시민사회가 노력하는 문제로 생각했다.
이 당시 원고를 쓰면서 나는 ‘사회적’이란 말이 위험하게 작용할 것으로 생각했다. 시민사회와 정부의 결탁과정에서 ‘국가’란 존재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주체로 호명되는 관과 민 그리고 기타 가용한 자원들은 국가를 공유한다고 가정해버린 채, 모호한 관계 설정을 통한 상상적인 집단화의 시도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모호한 설정은 각각의 주체에 역할들을 혼동하게 만들어, 국가가 해야 할 일, 정부가 해야 할 일, 시민사회에서 해야 할 일, 기타 기업과 같은 다른 주체들의 책임과 역할을 용해시켜버린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책임이 작동되지 않아, 각각의 명확한 책임을 구분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굳이 사회적인 것들이 대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국가론 없는 정부와 사회적인 것들

사회적인 것들은 흔히 정부가 실패한 영역에 대안적으로 해결하려 도전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러한 노력이 과욕처럼 느껴졌다. 정부가 할 일과 사회적인 것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다르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것들은 정부의 역할을 대신 하는 임무가 아니라 정부가 보지 못하고 있는 다른 영역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시민사회 단체들은 정부의 사업을 위탁 받으며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하고 있고, 그것을 마치 사회적인 것 인양 머무르고 있는 현실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정부와 시민 사회의 계약 관계를 통한 관-민 협력체계는 사실상 갑을의 종속 관계로 귀결되어 운영되는 안 좋은 결과들을 많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세월호 사건 이전에 앞서 글을 쓰던 내 주장은 국가가 해야 할 일, 정부가 해야 할 일 그리고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에 대한 명확한 구분의 필요를 말하려 했다. 이 중 특히 정부와 시민사회가 각각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 했었다. 그리고 정부와 민간이 협력체계를 갖기 위해선 각자의 책임을 명확하게 하는 새로운 파트너쉽 구축에 노력하여야 함을 강조하고자 했다. 국가를 상징체계로 바라보며 실체 없이도 정부와 사회는 유지 가능하고, 다만 국가란 존재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갖고 철학을 공유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려 했다. 여기까지가 세월호 사건 이전에 이야기하려 했던 부분이었다.

세월호 침몰 이후의 생각들

하지만 세월호 침몰 이후에 이러한 생각도 약간의 변화를 겪고 있다. 그 이유는 복지의 안전망 이전에 국민의 생존과 안전 보호라는 기본조차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지 못하고, 그럴 의지가 있는지 조차 의심이 든다. 또한 현 집권 정부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깨닫고 국민으로서 최소한 삶을 지키기 위해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더욱 빠른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이전과 다르게 사회적인 것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상황이 아닌 가 고민하게 되었다. 국가도 없고 정부도 책임지지 않는 이 무정부 아노미 같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것들은 생각보다도 많은 역할과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를 반영하여 사회적인 것들의 목표도 재설정되야 한다 생각이 든다.
이 사건에 책임을 져야 할 정부는 국가 시스템을 개선한다는 말을 하며 몇 가지 시스템을 개선하겠지만 그 지배 시스템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 또한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다고도 말하겠지만, 이미 불신이 너무 커졌다. 그리고 국가는 단지 안전만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부에서는 안전을 강조한다는 핑계로 통치를 강화하고 억압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국가를 다시 묻다

세월호 침몰 이후에 앞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주요 질문은 어떤 국가에서 살아가야 하는가이다. 국가는 통치가 작동하는 체제가 아니라, 국민에게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 있는 주체이다. 상징이 아니라 실재하여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국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세월호의 희생 학생들도 세 모녀도 모두 살려내는 책임을 져야 했던 것이다. 이제는 국민으로서 국가에게 물어야 할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단지 투표권자가 되어 특정 정부에게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정권이든 어떤 정부이든 앞으로 만들어 갈 국가에게 바라는 요구는 동일하여야 한다. 그동안 우리가 국가의 상이 불명확하였음을 발견하였고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할 것은 ‘국가론’이다.
우리는 국가를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선택불가능하고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기대가 많았다는 말이 아니다. 민족주의로 자극된 애국심은 애증에 가까운 현상적으로 존재하였다. 그래도 한편 믿음은 예전보다 사회가 변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거나 보호해줄 것이란 기대는 없었지만 최소한 방해하거나 무책임하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이야기와 문제제기를 별로 하지 않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 불평불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국민에 익숙해졌다. 정부와 정치권에게 문제를 제기하며, 투표를 통해 정부를 바꾸는 것에 바래왔다. 이런 노력이 사실상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원하지 않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선거철이 지나고 각자의 삶과 생존에 대한 고민들에 함몰 되었다. 투표가 사회를 바꾸는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이지만, 지금 우리에겐 투표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세월호 침몰이란 최악의 사건을 마주하고는 더 이상 국가와 정부에게 요구만으로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란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사회적인 것들이 국가와 정부의 역할을 어쩔 수 없이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국가란 존재가 희미해진 시대에, 직접 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정치권과 정부가 모두 불확실한 존재들만 남은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오히려 사회적인 것들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힘이지만, 의지를 가진다면 지속가능한 존재형태이다. 국가가 정부가 변화의 의지가 없을 때, 사회적인 것들은 이제 그들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재설정하여야 한다.

사회적인 것들을 위한 질문 방식의 변화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이 정부의 책임을 대신하는 방향이나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차원이 아니라, 국가와 정부가 책임지게 만들고 실체화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것들은 정치적인 것을 연결하고 강화하여야 한다. 일차적으로 정부를 바꾸기 위해서 정치적인 것들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단지 사회 구조와 시스템을 바꾸는 문제를 넘어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인 것들은 이러한 사람을 어떻게 바꿀 지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영역이 될 것이다. 사회적인 것들은 정치적인 것들과 연결해 정부를 바꾸고, 주변의 사람들과 사회를 바꾸어 다시 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목표로 재설정한다며, 질문은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고 싶은 국가는 어떠한 국가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와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어떤 노력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정부는 누구인데, 그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조건은 다음과 같다”며 구체적인 생각으로 질문하고 요구하며 실천하여야 한다.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Prev Post Next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