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보호 대신 ‘돌봄과 배려의 윤리-공동체’를 위하여(38호)

2014년 5월 9일culturalaction
[편집자주]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이 있는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달’이라는 언어는 마치 가정이 꼭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래서 가족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이번 문화빵 38호에서는  1인가구가 늘어나고 있는 시대에 ‘가족’이란 무엇인지, 다양한 가족과 관계의 형태, 그리고 어떤 관계와 공동체가 필요한지를 다루었습니다. 아직도 은연중에 가지고 있을지 모를 ‘정상가족’에 대한 통념을 돌아보고, 기존의 가족담론에 갇히지 않는 ‘관계’란 무엇인지, 그리고 억압적이지 않은 ‘관계’를 위해, 공동체에서 필요한 윤리(들)_돌봄과 배려_는 무엇인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① 가족 내에서 모든 사람은 행복한가? 가족 외부의 사람은 모두 불행한가?_노명우(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② 보호 대신 ‘돌봄과 배려의 윤리-공동체’를 위하여_이종찬(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③ 다양한 가족, 사는대로 길을 내기_더지(가족구성권연구모임)

보호 대신 ‘돌봄과 배려의 윤리-공동체’를 위하여

이종찬(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leverty@hanmail.net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들을 향한 애도의 물결이 뜨겁다. 이번 침몰 사고가 국가 시스템 전반에 대한 불신과 맞물리면서 국정원 불법 선거 개입, 간첩 조작 사건 등에도 끄떡 않던 현 정부의 지지율조차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을 향해 가장 많이 들려오는 말이다. 어린 나이에 허무하게 세상을 등진 학생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말이다. 다만 단원고 학생들 외 일반 희생자들의 수도 적지 않다 들었다. 우리가 보호하고 지켜주지 못한 이들은 비단 단원고 학생들만이 아닌 것이다.

‘보호’라는 말은 세심함을 요하는 단어다. 이를테면 ‘내가 너를 지켜줄게.’라는 언뜻 숭고하고 감동적으로 들리는 말조차 보호라는 이름의 미명하에 피보호 대상의 자유의지를 침해할 수 있다. 보호를 매개로 모종의 권력이 개재되는 경우다. 아직 미성년 나이에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비대칭적 ‘보호 권력’이 행사되곤 하는 것이다.

탈핵/생태 운동 진영의 캐치 프레이즈였던 ‘아이들을 위해 핵 없는 세상을!’이란 구호가 도마 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 접한 적이 있다. 문제를 제기한 쪽은 청소년운동 진영이었다 한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근거로 한 사람의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판단하려는 연령주의적 가족주의적 태도가 불편하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이 같은 반응에 녹색운동 진영의 사람들은 나름의 상처를 입었던 것 같다.

대인 관계에서 나이의 많고 적음 혹은 동갑 여부를 중시하는 태도 ― 즉 ‘연령주의’가 이 땅에서는 일반적으로 지켜져야 할 상식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사회적 관습에 익숙하지 않거나 못한 이들이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 단적으로 호칭 문제가 그러하다. 내 경우에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가능한 한 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나름의 기준을 어렵사리 세울 수 있었는데 나와 비슷한 나이의 또래나 연하의 사람들에게는 ‘씨’라는 호칭을, 연상의 사람들에게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선호하는 편이다. 먼저 ‘선’(先), 날 ‘생’(生). 문자 그대로는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단순히 밥그릇 수의 많고 적음 때문이 아니라 ‘나는 당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자세가 되어있다’는 예의와 공손함이 배면에서 은은하게 느껴져 좋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는 아버지가 각기 다른, 4남매를 홀로 키우는 미혼모가 등장한다. ‘키운다’는 표현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 이 어머니는 4남매를 키우는 보호자라기보다는 차라리 동료나 친구의 모습에 훨씬 더 가깝다. 가령 직장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아이들에게 오늘 저녁 메뉴는 무어냐 물으며 천진한 얼굴로 밥을 차려 달라 말하고, 그런 엄마를 아이들은 환한 얼굴로 반기며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엄마는 그들에게 더없이 근사한 또래친구이자 벗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근대적 가족 모델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전혀 아닌 것이다. 연령주의와 보호주의의 인식 틀에서 한참 벗어난 듯 보이는 철없이 무구한 엄마의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친밀함과 가까움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엄마가 동시에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꿈꾼다는 데서 비롯된다. 엄마가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날이 갈수록 뜸해지는 것이다. 어느 날 맏이의 뾰로통한 얼굴을 앞에 두고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말한다. “엄마는 좀 행복해지면 안 되니?”

부모의 양육 책임을 방기한 <아무도 모른다> 속 엄마를 비난하는 일은 손쉬운 일이다. 뉴스 헤드라인에 ‘자식들을 버린 비정한 엄마’ 정도의 한마디로 간단히 언급될 기사감이 아닌가. 우리는 얼마간 혹은 상당 부분 그런 류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 기사들을 소비하고 있기도 하다. 브라운관 혹은 모니터 바깥에서 팔짱을 끼고 자못 엄숙한 얼굴을 하고는 엄마의 잘못을 순전히 도덕적이고 개인적인 층위에서 비난하며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그지없는 ‘한마디 논평’ 행렬에 너도나도 동참하곤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다른, 네 아이들을 홀로 키워야 할 미혼모 여성으로서 그녀가 아프게 맞닥뜨려야 할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불평등에는 정작 눈과 귀를 닫은 채 말이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자식을 둔 어머니의 인터뷰를 접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발달장애아 부모들 치고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놀라운 건 그 이후에 이어진 말이다. “그런데 혼자 죽을 생각을 하는 엄마는 없어요. 십중팔구 아이와 함께 죽을 생각을 하게 되지요.” 아니, 아이가 무슨 죄란 말인가, 죽으려면 저 혼자 죽지. 쉽게 터져 나올 수 있는 반응이지만 동시에 절반 정도의 진실을 누락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주던 유일한 존재인 엄마가 사라질 경우 사회복지에 대한 의식수준과 체계가 일천한 이 땅에 혼자 남게 될 아이의 처지는 엄마 입장에서는 악몽 혹은 재앙에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에게 엄마를 맘 놓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한국에서 발달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가. 인터뷰 도중에 어머니는 자신 또한 아이와 함께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음을 어렵게 고백했다. 그러나 차가운 칼을 아이의 목에 대던 순간까지도 아무것도 모른 채 연방 웃음을 터뜨려대던 아들의 무구한 눈 앞에서 차마 실행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아이는 가끔씩 그 때 그 일을 입에 올린다. “엄마가 내 목에 칼을 갖다 댔어요.” 그 말을 하는 내내 어머니는 서럽게 울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공동체가 지녀야 할 윤리에 대해 부쩍 고민하게 되면서 보호 대신 돌봄과 배려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리고 있다. 보호라는 말에서 풍겨지는 연령주의적 가족주의적 태도는 우리를 어느 정도 편치 않게 만든다. 우리는 그들이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라 사회의 약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이 마음 아픈 것이다. 짐작컨대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 중 반월, 시화 공단의 노동자인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손가락 절단 사고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해 잊을 만하면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는 그곳.

또 하나. 윤리 문제에 있어 언제 어느 때고 합치되는 유일무이한 모범답안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것은 오로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결정될 것이다. 다수자의 ‘단 하나의 윤리’가 아니라 나와 관계 맺는 타인들의 숫자만큼 (그리고 그와 나의 ‘사이’에서) 존재하는 다수(多數)의 그러나 보편적인 윤리(들) ― 돌봄과 배려의 윤리(들)를 고민해본다.

가령 이런 경우. 나의 평화주의적 신념에 입각하여 9살 난 아들에게 장난감 총을 사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엄마가 있다. 그런데 이 엄마는 내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장난감 총이 유행인데 어미의 저 고매한 정치적 신념 때문에 제 아들에게 총을 쥐어줄 수 없게 됐으니 아이들 사이에서 아들이 소외되거나 배제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 자체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지만 나로 인해 정작 어느 누군가가 상처받을 수도 있을 가능성 앞에서 자신의 선택을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것. 다시 한번, “나와 관계 맺는 타인들의 숫자만큼 (그리고 그와 나의 ‘사이’에서) 존재하는 다수(多數)의 그러나 보편적인 윤리(들) ― 돌봄과 배려의 윤리(들)”. 그가 느꼈을 그 윤리적 진동(振動)의 시공간이 돌이켜보니 짠하다. 이 에피소드는 내가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이곳에 없는 박은지 전 노동당 부대표의 실제 이야기다. 많이 늦었지만 마음을 담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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