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석의 가르치다-배우다]실패한 국가에 저항해야 한다(37호)

2014년 4월 24일culturalaction

실패한 국가에 저항해야 한다

강정석 / 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장, 영상원 강사

sweetreal@naver.com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라는 책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탄생하게 만든 현대성의 발명품, 즉 ‘관료제’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바우만이 보기에, 관료제의 주요 특징은 ‘기능적 분업’과 ‘도덕적 책임성의 기술적 책임성으로의 대체’이다. 1)  기능적 분업으로 인해 개별 관료들 사이의 업무상의 거리가 발생하며, 이러한 거리두기로부터 특정 명령의 도덕적 책임은 단지 명령을 얼마만큼 더욱 잘 수행하는가와 관련된 기술적 책임성으로 대체된다. 이로써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개념인 ‘악의 평범성’의 차원을 넘어, ‘악의 사회성’의 토대가 사회적으로 구축된다. 유대인 절멸이라는 명령에 수많은 관료들이 아무런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점, 바로 이것이 ‘악의 사회성’이 지닌 끔찍한 성격이다. 홀로코스트가 다른 대학살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이렇게 분업화와 효율성, 수량화로 표시된 현대성이 만들어낸 구체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현대성의 특징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한, 홀로코스트가 재발되지 않을 것임을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
세월호의 침몰은, 바우만이 논했던 ‘악의 사회성’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한국의 관료제 체제는 (역사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는 데 더없는 효율성을 발휘했지만, 반대로 살리는 데에는 너무나도 취약한 것은 아닐까. 무책임, 책임 회피, 비정상적 관행, 무능력의 실상을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체험하다보니, 바우만이 말했던 ‘악의 사회성’은 어쩌면 그의 의도와는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사람을 살리는 데 무능력한 국가체제의 맹점을 은유하기에도 더없이 적절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기능적으로 분업화되어있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계획이 수립되지 않으며, 개별적으로 분화된 책임만 수행하기 때문에 대통령 이하 사건의 전체적인 책임을 지는 관료는 단 한명도 없다. 또한 정보수집의 창구가 여러 곳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수집되는 수치는 일치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수치는 실종자 한 사람이 지닌 생명의 무게감을 담기엔 역부족이며, 그렇기 때문에 수치화된 실종자와 사망자 수의 변화 양상은 마치 게임의 점수가 세어지듯 한없이 가벼워진다. 위계적이고 효율적인 체계를 세우기 위해 마련된 관료제의 기능적 분업화가 통제 불가능한 거대한 사건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기력함과 무책임함을 도처에 드러내게 되면서, 결국 책임의 구조 자체를 붕괴시키며 체계 자체를 무효화시키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실종자는 점점 줄어들고, 사망자는 늘어만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계적 질서는 중요하기에, 어떤 보좌관은 실종자 가족의 귀에 ‘교육부 장관님이십니다’를 속삭이며, 어떤 국회의원은 실종자 가족들도 가보지 못한 침몰 현장에 특권적으로 다녀왔으며, 어떤 여권의 경기도지사 예비 후보는 실종자 가족 앞에서 대통령의 현장 방문을 공지하기도 한다. 어떤 장관은 팔걸이의자에 다리 벌리고 앉아 황제 라면을 먹고, 어떤 보좌관은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심지어 어떤 도의원 예비 후보는 실종자 가족으로 위장하여 마이크를 붙잡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들은 실종자 가족들을 관리 대상으로 ‘취급’하며 이들을 ‘채증’한다. 이윽고 서울 시장의 유력 후보는 실종자 가족을 ‘미개인’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진도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가 되었으며,  실종자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호모 사케르’의 형상을 띄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악의 사회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3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실종자에서 사망자로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는 상태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무기력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이다. 언론의 선정적 태도는 극에 달했고, 무언가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기에 언론과 정부의 발표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정보를 숨긴다기보다는, 정말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알 수 없기에, 마땅히 전달해야 할 정보도 없는 것이 아닐까. 총체적 무능력과 무책임의 상태에서, 세월호와 함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도 침몰해버렸다.
문득,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그런 텅 빈, 공허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공허한 시간 속에 우리들의 슬픔과 기도, 애도를 켜켜이 채워 넣는 것이다. 방송도 하지 않고, 라디오도 중단하고. 언론도 시끄럽게 실종자와 사망자의 수를 헤아려가며 보도하는 것을 멈추고.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멈추고. 인터넷도 멈추고. 차량도 멈추고. 시끄러운 전광판도 스위치를 내리고…… 한국이란 총체적으로 망가져버린 국가에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조용히 눈을 감고, 세월호 실종자분들과 가족 분들을 위해, 애도와 기도의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분노다. 그리고 그 분노는 정확히 국가의 심장을 향해야 한다.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국가의 탄생은 일종의 교환관계로 설명된다. 즉 국가는 국민들의 주권을 빼앗아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형성하지만, 이는 국민들에게 안전한 삶의 터전과 삶의 재생산을 확보해주는 일종의 ‘거래’를 통해 성립될 수 있다. 2)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본다면, 즉 만약에 국가가 우리의 안전한 삶의 터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면, 이러한 거래는 깨지게 된다. 이미 더 이상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즉 국가는 더 이상 우리에게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을 우선적으로 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가 체계는 사람을 살리는 데 실패한 무능력한 조직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럼 더 이상 우리는 그러한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국가로부터 우리들의 주권을 양도할 이유가 없다. 실패한 체계, 실패한 국가에 저항해야 한다. 이러한 저항만이 우리의 슬픔을 애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천이 될 것이다.
1)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옮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새물결, 2014, 174p.
2)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세계사의 구조』, 도서출판 b, 2013, 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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