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방]랑, 랑, 랑희를 만나다.(37호)
랑, 랑, 랑희를 만나다.
강효주/문화연대
mycrom13@naver.com
인권운동계의 코스메틱
‘차가운 도시여자’ 랑희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미지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활동가들은 대체로 맨얼굴에 기름진 머리. 수더분한 외모와 캐주얼 차림이 다수였다. 하지만 랑희는 이들과 달리 멋쟁이다. 매일 감은 듯 윤기 나는 찰랑거리는 긴 머리. 심여를 기울여 그린 아이라인.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할 때도 운동권의 단체복장이 싫어 반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었다는 랑희. 동료 인권활동가도 랑희를 인권운동계의 코스메틱이라고 부르며 그녀의 화장술과 패션센스를 인정해 준다. 하지만 이런 랑희가 맨얼굴로 사람들을 대면한 적이 있다. “이게 좀 슬픈 이야기인데 우리 콜트공장 침탈을 당했을 때 그날 아침에 비가 왔어요. 2월 1일 날. 아침에 전화를 받고 달려갔어. 비 쫄딱 맞으면서 맨얼굴로 갔는데 그때 사람들이 내 맨 언굴을 처음 본거야. 사람들이 나를 보고 ‘랑희, 아이라인 정말 생명이구나.’ 그랬어요.” 맨얼굴로 집 밖을 나가지 않는 랑희지만, 콜트콜텍 투쟁은 맨얼굴로 뛰쳐나올 정도로 그녀의 활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인천민주노동자연대 상근자로 일할 때 콜트반대집회에 종종 나가다가 기타노동자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콜트콜텍 투쟁이 정체된 시기에 랑희의 친구들이 있는 문화연대가 결합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랑희도 문화연대와 함께 공동행동으로 연대하면서 5년째 콜트콜텍 투쟁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삶의 궤적을 들여다 보다
인권활동가가 되긴 전 랑희는 직장인, 프리랜서로 10년 간 살았다. 그녀의 첫 직업은 무역회사의 사무노동자였다. 그곳은 노동착취, 여성/공장 노동자 차별 등과 같은 문제가 많았다. 소심하게 윗사람들한테 개기다가 해고당했다. 어차피 해고될 걸 대차게 개기지 못한 것을 랑희는 가끔 후회한다. 두 번째 직업은 부엌가구 시공업자였다. 랑희는 그곳에서 소비자들에게 주방을 설계하고, 주방가구의 판매와 시공하는 일을 담당했다. 사장은 시공비를 부풀려 견적을 내서 이윤을 내길 원했지만, 거짓말을 못하는 랑희의 성격은 사장의 운영 방침과 늘 부딪혔다. 한번은 사장이 디스플레이 제품을 끼워 팔았고, 그것을 소비자가 알아챘다. 분노한 소비자는 클레임을 걸었고, 랑희가 손이 발이 되게 빌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런 일은 빈번했다. 결혼 후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 번째, 직업은 푸드스타일리스트였다. 평소 랑희는 푸드스타일링을 하고 싶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백수 혹은 비정규직 상태가 반복되었다. 말이 좋아 프린랜서였다. 한국 사회의 계약관계가 ‘갑을병정’으로 되어있다면, 프리랜서는 ‘정’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 자리는 남들이 알아주는 안정적인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돈을 벌 수 없는 힘든 자리다. 흔히, 사람들은 상점에 들어가 주인에게 “다음에 싸게 해주시면 다음에 올게요.”라고 말하면서 흥정한다. 이런 것처럼 사람들은 프리랜서에게 “너 한번 해보고 괜찮으면 계속 쓸게”라고 하면서 미끼를 던진다. 아니면, “내가 너한테 일을 줬으니까 나한테 보답해.”라며 생색을 낸다. 아주 잘 나가는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 이런 식의 착취 관계에 얽힐 수 밖에 없다. 이뿐만 아니라 일을 꾸준히 하기 위해서 인맥관리를 해야 한다. 뇌물과 접대가 오가는 관계들. 실력을 인정받으면 괜찮겠지, 하면서 버텼지만, 그런 관계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랑희는 일을 무척 좋아했지만, 일의 계약관계 상 비참한 기분이 들었고, 이런 기분을 느끼면서 일을 해야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정도 푸드스타일리스트로 자리 잡았을 무렵 그만두었다. 주위 사람들은 일이 자리잡기 시작하는데 왜 그만 두냐고 아쉬워했지만, 그녀는 정상에 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게 중요했어. 하고 싶은 일을 해 봤으니까. 더 미련도 없고 즐거웠어. 일 자체는” 그래서 그녀는 미련 없이 일을 그만 둘 수 있었다.
인권활동가로 살다
그리고 현재. 그녀는 인권활동가로 산다. 대학 졸업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마음 한켠에 답답함이 켜켜이 쌓였다. 일을 할 때 돈 버는 기쁨보다 부당함과 불편함, 무엇보다 내가 살고자 하는 지향과 다른 행동을 해야 할 때 오는 간극이 그녀에게 견딜 수 없는 큰 괴로움이었다. 그녀가 인권 활동가로 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가치와 일치하는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결정을 하기까지 10년이 걸렸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그런 시간을 살면서 인권활동가로 사는 게 더 즐겁겠다, 라는 확신이 든 거죠.”
인권활동가로 살면서 랑희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만났다. 특히, 이주노동자,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감각이 생겼다. 인권활동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하는 랑희. 그녀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연민의 시선과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감각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감각들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경험하고, 노력해야한다. 랑희의 주된 분야는 ‘공권력 감시’다.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찾아가 진상조사를 한다.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의 가족을 찾아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며 피해자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다독여준다. 또한, 인천지역에서 인천인권영화제를 열고,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미디어교육을 진행한다. 인권운동사랑방과 같은 인권단체를 인천지역에도 만들려고 준비 중이다. 이뿐만 아니라 건치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는 글쟁이기도 하다. 거기다 문화연대와 함께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의 투쟁을 돕기 위한 공동행동도 하고 있다! 오늘도 랑희는 인천과 서울을 종횡무진하며 타인에 대한 공감각을 넓히기 위해 힘쓴다.
랑희에게 문화연대란?
랑희는 “문화연대는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은 곳”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문화연대와 자신은 “우정으로 일을 끊임없이 주고 받는 관계”이자 “아끼는 그릇을 선뜻 빌려줄 수 있는 곳”이라고 덧붙인다. 랑희는 정말 문화연대에 친절하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직접 차를 운전해 와서 문화연대 총회 때 쓸 그릇을 빌려주었다. 이뿐만 아니다. 이사할 때 선물도 줬지, 문화연대 회원가입하라면, 회원도 가입했다. 그동안 랑희는 문화연대에 많이 퍼주었다. 랑희는 “기본적으로 문화연대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문화연대 활동가들과의 우정의 깊이가 읽힌다. 랑희에게 문화연대는 술을 먹을 수 있는 친구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문화연대 활동가들이여, 빠른 시일 내에 랑희와 술 한잔 하길~
* <길다방>은 말이죠..
<길다방>은 문화연대의 친구들에 관한 글입니다. 문화연대가 하는 일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어디든 나타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심양면 도와주며 문화연대와 끈끈한 우정을 맺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코너입니다. 그래서 시덥잖은 이야기는 많이, 가끔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