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를 이해하기 위하여]발명가의 몫(20호)

2013년 6월 19일culturalaction

[JPG를 이해하기 위하여]20호

 

발명가의 몫

 

임효진

 

요즘 역삼역에서 행사진행을 돕는 1주일짜리 단기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르바이트 구할 때 위치 수당 시간만 스캔하고 괜찮겠다 싶은 건 전부 지원을 누르기 때문에 막상 연락이오면 확인 차, 무슨 일 하는 건가요. 되묻게 되는데 이번엔 문자로만 통보가 와서 현장에 가보고나서야 어떤 일인지 알았다.

행사는 전국의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발명전시회 2차 심사였고 나의 주 업무는 심사장과 대기실을 오가면서 학생들을 안내하는 일이었다.

우리 다 어릴 적에 과학의 날 행사 같은 걸로 말도 안 되는 발명품 하나씩 만들어 본적 있잖아요 왜.

안쓰러울 정도로 초긴장상태인 아이들이 마냥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뭐 만들었어요? 라고 질문하면 참 성실히도 답 해준다.)

실제로 아이들의 작품을 보고나면 그 감정은 존경과 경외심으로 바뀌고 만다.

그리고 그중엔 이미 자신의 아이디어로 특허를 낸 경험이 있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  그니까 열정과 능력 두 가지 모두 나보다 훨씬 나은 친구들이었다.

전문가들의 심사기준은 무엇에 방점이 찍혀있을랑가 나는 잘 모르지만 종종 “끄앙 귀여워! 시판되면 당장 사고 싶다 하읏” 하게 되는 걸 들고 들어오는 학생들이 있다.

나의 덕심을 자극하는 낭만적인 발명가들은 대게 심사가 끝나고 어두운 표정으로 방을 나왔다.

내가 궁금해서 왜? 뭐래? 물어보니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못했고 자긴 망한 거 같다고 울상을 짓는다.

그 질문들에는 단가라든지 기존 제품들과의 차별성 및 실용도를 따지는 예리한 지적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터, 어린친구들을 당황시키기엔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도 나의 취향은 마이너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했지만 나의 임무는 일단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는 것이기에 목소리를 두 톤 정도 높여 열심히 작품을 칭찬해주었다.

며칠 동안 수백 명의 학생들을 만나면서 나도 초등학교 ‘만들기’ 시간에는 꽤나 열정적이었던게 생각났다.

그 ‘만들기’교과의 정체가 ‘미술’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또 그 전에 미술이라는 게 몹시 어렵고 힘든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는 걸

할머니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졌고 학교에서 시험 몇 번 보고 올림픽도 보고 월드컵도 보고 하니 금세 고등학생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맨 처음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순간을 떠올려보면 역시 발명이라는 건 참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때 그 ‘만들기’시간에 핀홀카메라를 직접 만들어본 적이 있는데 나의 것은 완성도가 떨어져서 제대로 작동은 되지 않았지만

(고무동력기때부터 신물 나게 겪은 일이라 ‘설명서’대로 해도 안 된다는 사실은 일찌감치 숙지한 인생의 진리지 말이다.)

카메라의 작동원리에 대해 마법 혹은 마술적 환상을 품고 있던 나는 그 간단한 메커니즘에 크게 감동했다.

나는 어쩌면 사진 이전에 카메라라는 기계자체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핀홀카메라를 시작으로 흔한 오타쿠들이 그러하듯 나는 중학교때부터 본격적으로 카메라의 외모에 끌려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는(2003~4년)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이 완전히 대중화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고 ‘최신 과학기술’의 성과인 디카는 어쩐지 시시하게 느껴졌다.

당시 내 관심 기종은 필름을 사용하는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였다. ( 중고나라에 들어가 보면 종종 ‘클래식 카메라 6종 팔아요’ 같은 게시물에서 만나 볼 수 있는 것들.)

일단 이쁘고, 이쁘고, 또 이쁘다.

물론 지금은 중고시장을 돌아다니며 클래식카메라를 사 모을 만큼의 돈도 열정도 없다.

내가 카메라를 보는 실질적인 기준이 ‘가격대비 성능’이 된지 오래지만 예민하고 무거운 쇳덩어리가 기계로서 갖는 외적 매력은 여전히 내가 사진을 찍는 행위를 사랑하는 감정안의 큰 부분이다.

내 취향에 대한 설명은 이정도로 됐고 다시 발명가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최초의 사진기술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야겠다.

 

니세포르 니엡스, <르 그라이의 집 창에서 내다 본 풍경> 1827년경

ㅡ 8시간의 노출을 주어 촬영한 세계 최초의 사진

 

실질적인 세계 최초의 사진발명가는 니세포르 니엡스라는 사람이다. 그는 형, 클로드 니엡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명이 아닌 ‘발견(discover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 두 단어의 차이가 당시의 그에게 어떤 의미구조였을지 나는 모르지만 ‘사진’에 ‘발견’이라는 술어를 사용한 점은 좀 낯설다.

니엡스가 이후에 ‘발견’을 ‘발명(invention)’으로 수정하게 되는 계기는 ‘특허’와 ‘저작권’을 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진기술의 ‘발명’을 자본으로 더 잘 활용한 이는 우리가 흔히 (공식적인) 최초의 사진 발명가로 알고있는 다게르(니엡스의 동업자)이다.

물론 ‘발견’과 ‘발명’이라는 논의안에는 이 보다 훨씬 복잡한 과학적 쟁점들이 존재한다.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사실 잘 모르고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발명이나 과학이라는 단어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지내온 내가 어린 친구들의 열정과 긴장을 며칠동안 관찰하면서 발견한 ‘발명’의 낭만에 대해서다.

앞으로도 많은 것들을 발견했으면 싶은 마음, 특허가 없어도 멋진 발명가일 수 있다는 걸 어른들이 많이 알려줘야 할텐데 하는 걱정.

니엡스에 대해 그의 동료 푸그가 쓴 글은 발명가의 낭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인류학자도 아닌데, 니엡스는 화학, 물리, 기계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학문을 사랑했던 것은, 스스로가 탐구하고 개발해 낼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매력때문이었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고, 역사와 문학에 경도되어 있었다. 만약에 그가 지성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생활했었더라면, -외진 바닥에서 무명으로, 수줍어하고, 고립된 생활 속에서 홀로 과학적 실험들을 해나가는 대신에 그는 여지없이 일급 학자로서의 각광과 찬사를 받았을는지도 모른다. 그의 겸허한 성품에 걸맞게, 그에게 있어서 결여되었던 유일한 것은 단지 기회였을 뿐이다.”

(니세포르 니엡스 박물관은 프랑스 중동부의 Saone강 상류에 자리잡은 샬롱 쉬르 손 시에 위치하고 있다. 방대한 소장품들은 물론이고 마을 자체가 아름다워서 나중에 꼭 한 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단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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