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과 종이]서정을 말할 수 없는 현실에서 살아가기ㅡ 막스 오퓔스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20호)

2013년 6월 19일culturalaction

[스크린과 종이] 20호

 

서정을 말할 수 없는 현실에서 살아가기

ㅡ 막스 오퓔스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최혁규 / 문화연대 활동가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한다

 

ㅡ 최승자, ‘이 時代의 사랑’ 中

 

 

때는 약 1900년, 한 세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는 시기. 비 내리는 오스트리아 빈의 어느 골목에 마차가 들어오고 한 남자가 그 마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하인으로부터 발신인 없는 편지를 받는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고, 그는 “이 편지를 받았을 때쯤 난 죽어 있을 거예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읽는다. 여성을 화자로 한 다수의 멜로드라마를 만들었던 막스 오퓔스의 1945년 작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첫 장면만 봐도 서정성이 짙게 묻어 나오는 작품을 현재 다시 본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술에서 서정성을 논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점을 가리는 신화 만들기라는 비판이 있지만, 과연 서정이라는 감성적 영역을 그렇게만 치부할 수 있을까?

우선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츠바이크의 소설은 한 남자만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비운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그 여성의 사랑에 감화되어 자신의 삶에 대한 윤리적 반성을 하는 남성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아마도 전자는 여상을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했다는 남성우월주의라는 비판을, 후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일종의 계몽적 윤리학이라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중요한 점은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다룸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글을 쓰는 작가를 글을 읽는 독자로만 전환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다는 점, 현존하지 않는 것을 편지 읽기를 통해 잠시 동안 환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소설은 개인적인 정서만을 담아낸 것만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 철학적 성찰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소설과 영화라는 예술 장르에서부터 오는 차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라는 소설과 영화에서의 큰 차이는 츠바이크의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은 작가이고 오퓔스의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피아니스트라는 점이다. 소설에서는 글을 쓰는 작가로 등장했던 사람이, 영화로 각색할 때 남자 주인공이 영화 감독으로 변주되지 않은 점은 눈여겨 볼 만 하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과 다르게 여성의 일방적인 사랑이 어긋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일방적인 것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영화에서 남자는 하인에게 그녀의 존재와 이름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삶에서 삭제된 부분을 확인하고 호명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차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계속해서 도피하고 감각적인 유흥을 즐기던 남자가 편지를 다 읽고 현재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받아들이는 영화의 결말이다. 즉 죽음으로서만 증명할 수 있었던 한 여인의 삶과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재구성한 남자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전의 그를 현실도피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던 상황에 대한 설명은 그녀의 시점에서 제거되어 있다. 단지 이전의 그는 그냥 한 사물로서의 사람이었을 뿐이다.

막스 오퓔스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곳저곳을 떠돌았던 그의 삶과, 여성의 삶과 연극에 대한 그의 애정, 그리고 영화 내 프레임의 활용과 우아한 카메라의 이동 등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내적인 서정성의 힘과 영화에 있어서의 서정성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정적인 표현 (lyricism)을 담고 있는 영화가 멜로드라마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통속적이거나 신파적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이는 정서에 대한 현실도피적인 면을 ‘감상‘이라는 말로 전환시켜 비난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영화가 사랑에 대한 정서를 구현함으로 인해 갖게 되는 서정성을 부르주아적이고 현실도피라고 하는 것은 현실을 아름답게만 바라보려고 하고 자신을 딛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을 서정이라고 국한시킨 탓이다. 가령 몇몇의 드라마와 영화처럼 현실에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은폐하려고 하는 작업은 지적받아야 할 면이 있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에 대한 정서나 이것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틋함을 표하려 하는 인간의 욕망이 있다. 서정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면 이들이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없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이런 욕망이 투영되어 있으며, 이런 것은 영화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영화는 기계를 통해 삶의 순간들을 담아내고, 상영을 통해 그 순간들을 잠시 동안 우리의 눈앞에 환생시킨다. 영화는 항상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품고 있다. 같은 방향으로 앉아 스크린에 투사된 아련한 빛들의 움직임을 보다 영화가 끝나고 좌석에서 일어나 각자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는 과정엔 언제나 영화의 서정이 짙게 묻어 있다.

 

 

‘서정으로의 복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반역자로 내몰아버린 서정을 다시 자리매김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서정만을 고집하는 것도, 서정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이분법적인 편들기일 뿐이다. 사실 현실을 돌아봤을 때,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자들은 그들대로, 그리고 현실이 불만족스럽지만 자신의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삶을 사는 자들도 그들대로, 또한 현실에 도전하고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투쟁하는 자들도 그들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는 것 같다. 사랑의 부재. 부푼 사랑에 대한 꿈도 꿀 수 없는 시대에 자신이 서 있다는 인식 또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야만 왜 서정이나 사랑과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인가에 대해서도 자문해볼 수 있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에서 여자 주인공이 처음 듣는 남자의 연주곡이 바로 리스트의 ‘탄식(<Un Sospiro>)’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랑을 풀어볼 기회도 갖지 못한 것에 대해 한탄하고 한숨 쉴 수조차 없는 것인가? 한 여인의 편지를 읽고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직시하는 한 남자의 경우처럼,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다는 극장 안 현실이 끝나고 다시 극장 밖 현실에 발을 디뎌야만 하는 우리의 경우처럼, 현실을 딛고 한 걸음 나아가려는 움직임의 그 어딘가에 서정의 자리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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