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로운 덕후의 우울] 야한 만화? -만화 동인지와 섹슈얼리티(20호)

2013년 6월 19일culturalaction

[잉여로운 덕후의 우울] 20호

 

야한 만화? -만화 동인지와 섹슈얼리티

최지용

 

‘동인지’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경향이 같거나 뜻을 함께하는 문인들이 모여서 편집하고 발행하는 잡지’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조금 다른 형태의 ‘동인지’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모여서 발행하는 야한 만화잡지.’ 물론 만화 동인지가 성인물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동인지라는 이름으로 접하는 만화들은 대부분 포르노그라피이다. 그리고 실제로 만화 동인지의 상당수가 성적인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인지는 대개 아마추어 만화 애호가들이 자비로 출판하는 경우가 많으며, 주로 ‘코믹마켓’ 같은 장소에서 판매된다. 대부분 이미 유명해진 저작물에 대한 패러디 또는 평행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단편 창작물인 경우가 많다. 동인지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 중 상당수가 여성이며, 이들 중 상당수가 ‘부녀자’(腐女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부녀자’는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소설 등에서 남성끼리의 성애(BL: boys love)을 즐기는 여성을 일컫는다. ‘부녀자’란 여자 앞에 썩을 부(腐)자를 붙인 말로 ‘우린 썩었다.’는 자조의 의미로 생겨난 말이다. 

잠시 내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나는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까지는 다른 많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사도마조히즘적으로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는 포르노그라피를 아무 생각 없이 보았었다. 또래보다 다소 미숙했던 내가 처음 포르노를 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가 좋은 걸 보여주겠다며 틀어준 야동이 나의 첫 포르노였다. 근데 그것이 보통의 포르노물이 아니라 엄청 하드코어한 야동이었다. 어느 백인 여성이 말과 수간하는 영상이었는데,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역겨운 감정이 들었다. 처음으로 성행위를 접한 것이 하드코어 수간물이라니. 그 뒤로도 야동을 접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야동을 볼 때 느끼는 알 수 없는 이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만화 동인지였는데, 동인지 매니아인 친구 덕분이었다.

 


사진 첨부, 사진 설명: 일본어 해석은 각자 알아서^^

내가 처음에 보기 시작한 동인지는 대부분 남성 작가가 그린 것으로, 성행위를 사도마조히즘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있어서는 사실 야동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영상물에 비해 표현에 제약이 없다보니, 좋게 말하면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나쁘게 말하면 훨씬 자극적으로 성행위를 묘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동에 비해서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던 것은, 만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판타지 때문인 것 같다. 만화는 종종 현실의 불합리한 모습들을 환상으로 감추어버린다. 사도마조히즘적 변태 성행위가 가진 가부장적 폭력성을 축소, 왜곡시킨다. 많은 동인지 작가들이 사비를 들여서라도 기꺼이 야한 만화를 그리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현실의 인물을 대상으로 야한 상상을 하는 것은 꽤나 죄책감이 드는 일이지만, 만화 캐릭터를 상대로 성적 욕망을 품는 것은 이런 죄책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이렇게 만화 캐릭터에 품은 욕망들을 자신의 창작물로 창조해 내는 것이다. 만화의 이러한 특성은 양날의 검이다. 자유로운 성적 표현을 통해 다양한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하는 한편, 자신의 창작물을 반성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한다. 

누군가를 성적 대상으로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동성 혹은 이성의 육체를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일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감정이 어떠한 사고의 메커니즘 위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성행위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할 수 있지만, 상대방의 마음이나 의사를 무시하고서라도 성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적 대상으로 느껴지는 사람을 비인간화시키는 것, 상대방의 육체를 조각내어 분해하고 인격을 거세하는 것은 가부장제 폭력성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적 제도적 규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것이지, 그러한 규제 장치들이 사라진다면 언제든 그러한 폭력을 휘두르게 될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폭력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그 사람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성폭력적인 사회 문화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이라고 해서 가부장적이고 성폭력적인 사고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여성들 또한 이 사회를 통해 끊임없이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학습 받았기 때문이다. ‘부녀자’들이 그려내는 BL물은 이러한 성폭력의 경계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다. 남성과 남성간의 성행위를 그려내고 있지만, 이성애 성애물에서 흔히 묘사하는 사도마조히즘적 성관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다. 상호 존중과 배려가 있는 성관계를 상상할 수 없다면, 우리는 가부장적인 문화로부터 끝내 탈피할 수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의 가치는 가장 은밀한 곳에서부터 이루어져야한다. 공적 영역에서 아무리 페미니즘을 외친다고 하여도 사적이고 은밀한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러한 페미니즘 운동은 끝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진지하게, 나는 야한 것이 좋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볼 때, 나는 기분이 좋다. 그만큼 성적 매력이 있다는 것이니까. 나는 종종 가부장제적 성 관념에서 탈피하려는 남성과 여성들이 성행위 그 자체로부터 멀어지려하는 경우를 보곤 한다. 지금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성관념이 매우 잘못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 그 자체로부터 멀어질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성관계이다. 다른 상상을 통해 좀 더 아름다운 성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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