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과 종이]심판과 종말의 이미지 – <노아> 리뷰(36호)

2014년 4월 9일culturalaction

심판과 종말의 이미지 – <노아> 리뷰

강신유(moonsl32@gmail.com)

 얼마 전 극장에서 <노아>의 예고편을 처음 접했을 때 4년 만에 선보이는 대런아로노프스키의 신작이 성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는 사실에 놀랐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창세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찍은 감독이 아로노프스키라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 같다.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술과 문화 전반에 깊이 뿌리 내린 “이스라엘 신”의 심상이 오늘날까지도 무수히 많은 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다뤄지고 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리고 이 시대 주목 받는 시네아스트(cineaste)의 신앙고백을 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그의 <노아>는 굉장히 기묘하고 레디컬한 영화였다. 장면들을 그리는 작가의 상상력이 간결한 창세기 서술의 행간을 채우면서 본래의 느낌을 많이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 주인공 노아의 모습은 신이 내린 종말의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선택 받은 선한 인자이기 보다 신의 심판계획이 완성되도록 주어진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사명자에 가깝다. 부여 받은 사명을 완벽하게 수행하려는 그의 굳은 의지는 다소 비인간적인 모습까지 띄는데, 얼마나 신의 뜻을 완벽하게 내면화했는지 스스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타자화시켜 자신과 가족들까지도 마지막에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물론 인간 노아는 신이 부여한 사명과 인간적인 감정 사이에서 고뇌한다. 이런 내용들은 성서의 내용을 통해 직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 생각했던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그 방향이 많이 달랐기 때문일까, 이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뜻밖의 지점에서 논쟁이 일고 있다. 물론 다양한 의견들이 있겠지만 상당한 수의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가 본래의 성경 뜻과 다르다며 강하게 비판한다. 영화가 성서의 내용을 왜곡하고 있고 반기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특이하게 그린 이 영화를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노아>가 반 신앙적인 의도 혹은 반 종교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감독의 인터뷰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감독의 마음과 양심에 비추어 솔직하고 신실하게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어느 정도 전통적인 교리와 상충되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영화에서만 보이는 타락천사, 뱀가죽 등과 같은 여러 생경한 설정들과 무엇보다 인간만큼 자연과 동물 등과 다른 신의 피조물들을 소중하게 여기고자 하는 일종의 생태주의 색채 때문일 것이다.
 생태주의는 이미 언어로 의식화되고 규정지어진 사상이지만 이 말의 실재는 어떤 생각의 방향과 방법이다. 이 영화가 생태주의 색채를 띈다 해서, 노아의 방주 사건이 갖는 본질을 생태주의사상으로 대체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억지다. 이 영화가 노아의 방주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의 실재 또한 기존의 교리 혹은 정통 신앙과 공존할 수 있다. 그리고 죄로 가득 찬 인간을 심판하는 이 세상 첫 번째 종말이라는 상황은 이러한 생각의 방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신이 추악한 인간 때문에 이 세상 전체를 물로 쓸어내 버리려 하는 창세기 속 상황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신을 믿으면서 명백한 신의 심판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이제 신이 죄로 가득 찬 인간들에게 대홍수의 심판을 내리듯, <노아>는 그 동안 헐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속에서 기고만장해온 배타적 인간애(人間愛)위에 철퇴를 가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후 방주를 차지하기 위해 진격해오는 인간들을 타락천사들이 방어선을 만들어 막는 장면은 얼핏 보면 너무 익숙한 판타지 블록버스터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주인공 일행이 가차없이 때리고 공격하는 대상은 괴물과 같은 타자가 아니라 바로 인간들이다. 이를 보고 있으면 비참한 장면을 목격하는 괴로움과 함께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사실 그 동안 스스로의 존엄성만을 내세우며 끊임없이 거만해지고 건방져진 인간의 모습에 우리 스스로도 너무나 심한 염증을 느껴왔다. 대런아로노프스키는 이 시대의 현상 앞에서 마치 신이 노아에게 온 세상이 물에 잠기게 만들 것이라는 의지를 미리 보여줬듯 우리에게 옛 종말의 이미지를 되새겨주면서 경각심을 갖게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마치 지혜로운 한 사람의 선지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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