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아트 행동주의]포스터작가 이하, 재기발랄하게 그리고 우직하게(36호)

2014년 4월 9일culturalaction

<뉴아트 행동파>① 

 

포스터작가 이하, 재기발랄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이광석/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공동소장

kslee@seoultech.ac.kr 

작가 이하를 처음 만난 것이 2013년 5월이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수원성 장안문 입구 안쪽 골목에 자리잡은 그의 자그마한 작업실이었다. 수원은 그의 젊은 시절을 함께 한 곳이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생활 이후 한국에 돌아와 정붙일 곳 없었던 객지에서 수원이란 곳은 그에게 엄마 품이나 다름없었다. 차분한 수원의 일상과 달리 그가 맞부딪힌 지난 몇 년간의 한국 생활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스스로를 ‘늙은 초보작가’라 지칭했던 겸손의 변에서 난 미술계와 사회에 겁 없이 덤비는 그의 순박함을 봤다.

   

‘표현의 자유’와 공포정치 시대

이하 작가는 높으신 어르신들의 얼굴을 팝아트 형식으로 특징을 잡아 풍자 포스터를 제작해 언론과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그 어떤 작가도 그 짧은 시간에 그보다 작품 표현으로 인해 사법기관과 법정을 들락거렸던 이도 없을 것이다. 2012년 5월에 그는 연희동에서 전두환 포스터를 붙이다 체포됐다. ‘경범죄처벌법 불법광고물 부착’ 혐의였다. 약식명령으로 1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그는 정말 그까짓 일로 체포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다. 예술가들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알 바 아니요, 포스터를 붙인 바로 그 ‘벽 소유자의 주거권 침해’와 ‘마을 주민들에게 고통을 줬다’는 것이 검찰의 주된 체포 의견이었다. 가택을 침입하거나 스프레이나 물감으로 그린 것도 아닌 쉽게 탈착 가능한 그의 포스터 퍼포먼스에 비해 그 대가가 혹독했다.
그는 불복했다. 정식재판을 청구해 2012년 3월 서울서부지법에서 30여장의 탄원서를 제출하며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다. 경범죄처벌법 재판에 대해서는 1심에서 선고유예가 나왔고 이에 항소를 제기해 2심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깟 푼돈 내고 말면 되지 왜 그 생(개)고생을 하는가 물을 수도 있다. 그는 죄가 아닌 것에 대해 죄를 묻는 어처구니없는 한국의 비정상적 현실에 맞서고 싶었을 것이다. 또 하나. 대선을 앞두고 행했던 그의 포스터 작업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1심과 2심 모두 무죄가 나왔으나 결국 검찰에서 다시 항고해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다. 몇 년간 독하게 치루고 있는 지루한 법정싸움의 삶이었지만 이들 경험은 이하 스스로에게 예술가 ‘초보’딱지에 빛나는 별 훈장을 달아주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해 선거법위반 국민참여 재판에서 판사 앞 그의 최후변론은 늠름에 더해 건방지기까지 하다.
“솔직히 전 그림을 꽤 잘 그립니다. 저에겐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제법 있는 거 같습니다. 저에게 유죄를 주신다면, 그것은 나의 모습을 부정하라는 국민의 뜻으로 알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절대로 어떠한 그림도 그리지 않겠습니다. 무죄를 주신다면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겠습니다. 언젠가 언론에서 세계적인 작가가 된 저의 모습을 보시게 된다면 무죄를 선택한 보람을 얻으실 겁니다.”
의외로 작가 이하는 공권력의 집요한 반응에 별로 심각해하지 않는다. 외려 초짜 작가가 검찰 소송건으로 보수적 예술판에서 특급 훈장을 달게 됐다고 허허 웃는다. 공판 때 지원해 몰려든 작가들에게 밥 걷어먹이느라 돈을 좀 썼지만, 그는 이제까지 몰랐던 중요한 많은 것들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 예술계의 어두운 역사에서 탄압 작가 중 하나로 올라가는 명예도 그렇거니와, 그의 법정 투쟁을 돕기 위해 모여든 많은 동료 작가들과 문화예술단체 사람들과 맺은 연대들이 그가 얻은 가장 값진 것들이리라.

미국에서 시작된 작가의 길

이하는 학부 시절 미술교육가가 되고 싶었다 한다. 전두환 시절 대학 초년생을 보냈던 청년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 당시 주류 미술계가 바보스러워 보였다 한다. 보수성, 학연과 미술시장에 얽매여 의식없이 비슷한 이들끼리 예술 권력을 나눠 갖는 비루한 현실이 싫었던 것이다. 석사 때까지 조소를 전공으로 하던 그는, 시사만화가 좋아 몇 년 고생하며 갈고닦은 실력으로 지방지 신문사에서 만화를 그렸다. 현실 정치에 대한 지금의 비판적이고 풍자적 접근이 이 때 경험 덕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 한창 플래시 작업의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그도 이를 업으로 삼았다. 의외로 일이 잘 풀려 회사 차리고 독립하여 꽤 두둑한 수입을 챙기기도 했다. 혼이 나갈 정도로 바쁘게 살다가 사기까지 당하면서 미련없이 그는 사업에서 손을 뗀다.
이어 대학에서 애니메이션 강사를 하다가, 이하는 영화를 배우고 싶어졌다. 나이 먹고 한국에서 정규 영화 공부를 하기가 어려워 결국 큰 결심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뉴욕에서 영화를 시작했으나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너무 어려워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포기한다. 당시 브룩클린에서 영화 편집 등 임시직으로 연명하며 살았던 이하는 어느날 자신의 천직이 될 미술가로서 삶의 전환과 같은 사건을 맞는다.
어느 이른 새벽녘 그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 담배를 살 요량으로 겁 없이 브룩클린의 황량한 골목길로 나섰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이하는 건물 건너편 벽으로 누군가 빔프로젝트로 쏘아올린 한 강렬한 이미지와 마주한다. 사냥꾼이 엽총을 들고 서 있는 이미지로, 마치 그이가 황량한 도시를 지키는 보안관 혹은 파수꾼처럼 보였다 한다. 그 강렬한 이미지를 보면서, 이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미술 작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2009년 6월 그날 밤 (공식적으로 그의 작가생활 출발점으로 삼는 때다), 이하는 청년시절 스스로 버렸던 미술에 재입문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미술 작업은 탈레반 병사의 이미지였다. 이하 작가는 될 수 있는 한 탈레반 병사를 예쁘게 형상화해 공모전에 출품했다. 미국의 언론들에서 비춰진 아프가니스탄 전쟁 속 게임 같은 영상과 이미지들, 그리고 생명을 파리 목숨 대하듯 하는 미국 자유주의의 허상에 대한 도발적 시선으로 그리 예쁘게 그렸다. 사안의 정치성으로 인해 입상은 고사하고 주제 선정의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공모 후에도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았다. 4등에 부상까지 받았다.
이하 작가는 여세를 몰아 개인전을 오프닝하고 미국 관객들의 호평까지 얻는다. 2010년 5월 말쯤 빈 라덴이 사살되던 바로 그 날이었다. 전시의 테마였던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에서, 이하 작가는 과거 독재자들을 두려운 인간이 아니라 만화 캐릭터같이 바보 같고 웃긴 ‘녀석’들로 그렸다. 빨간 리본을 맨 김정일, 터미네이터가 된 러시아의 푸틴, 람보의 복장을 하고 있는 미국의 오바마, 어린 양을 안고 예수로 재림한 오사마 빈라덴, 영화 속 권투선수 록키 같이 폼을 잡고 주먹을 날리는 리비아의 카다피, 이소룡의 노란색 추리닝을 입고 포즈를 취하는 중국의 후진타오 등이 전시됐다. 그에게 역사 속 ‘독재자’들이란 권력의 정점에 서 있지만 실지 지나고 보면 매우 범속한 우스꽝스런 이들에 불과했다.
그는 전시 도중 한 루마니아 아주머니의 눈물 섞인 대화로 다시 한번 ‘작가되기’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아주머니는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체스크 통치 시대, 그의 가족 모두가 총살당하고 생면부지 미국으로 홀로 망명해 살아가고 있던 터였다. 그의 전시로 인해 그녀가 개인적인 상처를 돌아보고 당시 기억을 소회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잔잔한 충격에 휩싸인다. 이제까지 자신의 그림이 누군가에게 의미있게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터에, 관객에게 삶의 위안이 되고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자신의 작업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얻는다.

입체 팝아트 풍자 

주로 이하 작가가 구사하는 작업 형태들은 입체감을 살린 팝아트이다. 인물 등 특정 사진 이미지를 가져와 컴퓨터에서 그려 재작업하고 디지털 프린트하여 오려낸 뒤 이에 솜을 집어넣고 화폭에 촘촘히 손바느질 해 꿰매 붙여 이미지의 입체감을 살리는 형태다. ‘오버록’ 재봉질이 불가해 시작한 손바느질은 어느새 기계의 경지에 이른 듯 감쪽같다.
그가 손바느질에서 착안을 얻은 것은 우연히도 집주인인 유태인 할머니 덕분이었다 한다. 부자임에도 지나치게 검소하던 그 노인은, 십 수 년은 족히 돼 보이는 구멍 난 숄을 항상 걸치고 다녔다. 발렌타인데이 때 맘먹고 그는 노인에게 새로 장만한 숄을 선물로 주고, 그 낡은 것을 달라 해서 수선을 했다. 수십년 묵었어도 기품이 있어 보였던 낡은 숄을 버리지않고 구멍난 곳을 메워 곱게 장미꽃 모양의 수를 놓았는데, 이하는 그것이 나름 괜찮아보였다 기억한다. 그 때 손바느질의 표현적 역할을 스스로 감 잡았던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원 시절 조각을 해서인지 작업을 하면서 그는 입체감에 대한 갈증도 있었다고 술회한다. 조소에 덧붙여 시사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했던 터라 왠지 한 작품 속에 이들 요소 또한 온전히 반영되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그는 입체형 팝아트 작품 형식을 통해 이 모든 요소를 적절히 구현하게 된다.
작가 데뷔 불과 1년쯤 넘어 이렇게 미국서 그는 공모전에서 여러 상을 받고 ‘독재자’ 개인전에서 인정받으며 자신감을 얻는다. 그는 곧장 한국에 갈 결정을 내린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했던 유학시절의 고민처럼, 그도 한국의 스펙터클한 사회 현실에 대한 작가적 개입이란 명제가 중요해졌다. 2010년 여름, 이하는 한국에 들어와 여러 전시들을 시도한다. 한국에서도 계속 팝아트 전시 시리즈를 벌였다. 개인전을 수차례 했고 전반적 반응들도 좋았다. 사회적 메시지는 덜했다고 회상한다.
당시 <역사의 인물> 시리즈에는, 김구, 체 게바라, 김대중 등 한국 역사의 획을 그었던 인물들을 모아 전시했다. <꽃미남 병사> 시리즈도 흥미롭다. ‘샤방샤방’ 캐리커처를 그리는 이동수 화백처럼, 그도 폭력의 전장에 서 있는 군인들, 즉 남과 북의 병사, 미군, 탈레반 병사 등을 아주 과도하리만치 예쁘게 형상화했다. 전장의 폭력성과 무관하게 겁먹은 듯 눈이 크고 예쁜 병사들의 모습에서 그는 오늘날 전쟁과 폭력성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또 한번 고민케 한다.
한국 데뷔는 이렇듯 괜찮았으나 국내 전시 중에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들을 겪는다. 전시 현장에서 희한한 장면을 자주 목도했다. 갑자기 그의 작품이 벽에서 떼어지거나 갤러리 관장이 전시 도중 창고에 자신의 작업을 넣어놓거나 혹은 구석에 처박아 두거나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졌다. 한국사회에서 화이트큐브의 보수성에 회의를 느낀 그는 또 다른 새로운 정치 표현의 욕망과 플랫폼 수단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포스터 행동주의의 길

이하 작가의 포스터 작업은 2011년 겨울쯤부터 시작한다.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처럼 그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원망과 정치적 피로감이 끔찍할 정도로 컸다. 무엇보다 예술작가들의 제도 순응성, 미술계 화랑 전시의 한계와 상업적 타락, 정치 현실의 비상식을 한두 해 겪어가면서 곧 그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로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고민한다. 그는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서 손바느질로 만든 프레임 작업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스트리트 아트’에서 줄곧 쓰는 대량 복제된 팝아트 포스터를 생각해냈다.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알리기에 포스터가 적격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그림이 담긴 포스터 50장을 일단 급하게 제작했다. 이를 들고, 그는 이른 새벽 무작정 종로로 나선다. 홀로 오금이 저리고 너무 무서웠을 것이다. 포스터를 들고 서성이다 용기를 내 몇 장만 붙이리라 마음 굳게 먹고 첫 포스터를 붙였다. 그런데, 그 새벽에 길 가던 젊은 신사분이 여기 보라며 너무 좋아하고, 누군가 그의 포스터 사진을 찍으며 플래시를 뒤에서 터뜨리는 순간 그는 힘과 희열을 느끼기 시작한다. 포스터 작가가 된 첫 순간이었다. 그 날부터 그는 디지털 프린트로 대량생산한 포스터를 들고, 언론사 앞 벽보나 행인들이 오가는 버스 정류장에까지 미친 듯 붙여댔다. 한 일간지 논설위원이 그의 포스터를 우연히 출근 때 보고 이를 사진기자가 찍어 보도하면서, 그의 포스터 이미지는 소셜웹을 통해 자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기자들이 그를 귀신같이 찾아 방문하고, 각종 지면을 통해 이하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동안 그는 총 9회 정도 주제를 달리해 시내 곳곳에 포스터를 붙였다 한다. 크게 대중들의 반응이 좋았던 것은, 삽이 그려진 넥타이를 맨 히틀러 차림의 이명박, 29만원 자기앞 수표를 들고 수갑을 차고 있는 전두환, 청와대 앞마당 백설공주 차림으로 박정희의 얼굴이 들어있는 독사과를 든 박근혜 공주, 대선 후보 단일화를 독려해 만든 문재인과 안철수의 반씩 포개진 얼굴 등이다. 그의 길거리 포스터 퍼포먼스가 언론에다 입소문까지 나면서 서울을 비롯해 전국 주요 도시들의 경찰과 대선을 앞두고 선관위가 잔뜩 지레 긴장하기도 했다. 이하 작가를 요시찰 주목하던 당시 선관위는, ‘독사과를 든 박근혜 공주’ 포스터를 부산 시내에 붙인 혐의로 검찰 고발했다.
재판이 진행된 이후로는 그는 벽에 붙이는 작업 대신에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포스터를 뿌리거나 패러디 신문을 제작하고 있는데 이 방법에 더 호응이 좋다고 자평한다. 가장 최근의 대표 작업으로는 ‘댓글 박근혜 종북 김정은’ 포스터였고 “댓글로 대통령이 된 자가 정당성의 약점을 덥고자 종북을 이용하는 시대를 풍자”했다고 전한다. 당연 보수신문의 악의적 표적이 되기도 했다. 조선일보를 패러디한 ‘조선구보’(朝鮮口報)는 마치 2009년 뉴욕신문을 패러디한 미국의 악동들 예스맨의 ‘아이덴티티 교정’작업과 흡사하게 이뤄졌다. 이하는 가짜의 ‘착한’ 조선일보판을 임시 2천장 제작해 지하철역 15곳에 뿌렸는데 어르신들에게 너무 반응이 좋아 30분 만에 증발해버렸다.

에로틱하게 정치권력을 흔들기 

그는 소신을 갖고 있다. 미술가의 언어를 대중이 단 5초안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미술도 이제 대중문화이어야 하며 개념미술조차 이와 같은 감응의 기제에서 예외가 아니라 단언한다. 그의 작업을 실제 찾는 이도 일반 민초들이다. 그는 내게 말한다. 부자들이나 메이저 미술시장에서 내 작품을 사러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이하의 작품을 사려는 사람들은 월수 1백만원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다. 예술가로서 대단히 대중적이나 그에 비해 돈을 벌기는 어려운 그의 길이다.
대선을 앞둔 격동의 시기, 그에게도 ‘나는 꼼수다’만큼의 대담한 정치적 풍자와 대중과 호흡하는 정서적 친화감이 있었을까? 2012년 8월, 이하 작가는 포스터 작업의 내용을 담아 ‘쫄지마’ 개인전을 열었다. 길거리 포스터들의 이미지 내용을 담고, 백범 김구, 김근태, 노무현 선생들을 모은 <눈물 시리즈>를 기획했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일했던 분들이나 억울하게 정치적 타살을 당했던 당대 인물들이었다. 이들 작업은 무엇보다 우리 현실의 타락한 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그들의 슬픈 얼굴로 인해 그리고 잔잔히 미소 짓고 있으나 그들의 눈가에 맺힌 눈물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시민청 그룹전 ‘멘붕 속에 핀 꽃’(2013)의 그룹전 작업에 소개된 작업들도 흥미롭다. 작가 이하는 <프리티 걸> 시리즈를 선보였다. 7장으로 구성된 이 작업들은, 야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의 몸매들이 에로틱하게 팝아트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작업 바탕 뒤로 LED전구가 묘하게 불을 밝힌다. 여성의 알몸 라인 위로는 그의 손글씨들, 예를 들면, ‘대통령을 탄핵하라’(impeach the president), ‘재선거 하라’(Must do reelection) 등이 새겨진다. 이하 작가는 여성의 몸은 언제나 그렇듯 대단히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였다고 본다. 그 에로틱한 몸의 정치성을 이용해 현실 정치의 폭압성을 알리고자 한다.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의 미발표 추가작도 이곳에서 공개됐다. 박정희 스타일의 군복을 입은 삼성 이건희 총수가 뒷짐 진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재벌 기업의 총수 몸매에서 한국형 경제 독재자의 상징성이 묻어난다.
2014년 3월 이하는 뉴욕 맨하튼 스코프(scope) 아트 페어 입구에 <눈물시리즈> 인물 포스터를 붙였다. 그가 길에 나서서 포스터를 붙인 이래 역사상 가장 긴장감 없이 포스터를 붙였던 것 같다고 투덜거린다. 기소에 대한 고민없이 붙였으니 말이다. 6월에 그는 개인전을 열 준비 중이다. 그에게 그럴듯한 갤러리가 대관을 해 줄 것 같지는 않다. 일단 거창하지만 <父情先巨展(부정선거전) – 대통령 탄핵을 위한 특별전>이 전시 제목이란다. 우크라이나 포스터 작업도 계획 중이다. 우크라이나 민초의 입장에서 평화 염원 포스터를 키예프 광장에서 붙이는 작업에 해당한다.
내게 예전에 얘기했던 이하의 머릿속 ‘다방 레지’ 시리즈란 후속작도 나올 것인지 궁금타. 내용은 이렇다. 다방 종업원의 몸을 빌려 그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미스고’가 한국 정치 현장에 불쑥 출현하는 상황을 잡고 있다. 한국의 스펙터클한 정치 현실, 예를 들면, 남북한 문제, 보수진보 대립, 일본 문제, 친일파 문제 등 정치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이미지에 미스고가 등장한다. 예를 들면, 남북한 병사가 총을 맞대고 있는 심각한 장면에 미스고가 요염하게 커피를 따르거나, 미스고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장면 등이 설정된다. 미스고는 코믹함과 에로틱함의 절정이자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절쯤 된다. 그는 이미 흔히 알만한 정치가들을 출연 배역 명단에 올려놓고 있다.

순수 청(중)년 팝아트 정치예술의 길

보수적 예술계나 우리네 정치문화 수준으로 봐도 이래저래 초보 작가 이하의 국내 생활이 순탄치 않아 보인다. 예전에 내게 건넨 눈물 맺힌 노무현 작품에서 보이는 쓸쓸함이 그에게서도 묻어난다. 그래도 여전히 씩씩하다. 내게 최근 자신의 업데이트된 활동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내게 멋진 척 글 말미에 적어놓았다. “민주주의가 덜 성숙된 사회라면 예술가들은 나서야 한다. 어떠한 불편함에도 굴하지 말고 과감한 세상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술가들의 숙명이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다.” 기특타. 물론 이념과 정치에 대한 과잉에 대한 위험을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수고도 아까지 않는다. 내게 보낸 글에서조차 보여지는 그의 해맑음에 그저 미소 짓는다.
<작가 이하 자신이 쓴 프로필>
충남 아산 출생. 고등학교 졸업식날 짜장면을 처음 먹어보고 대학가서 돈가스를 처음 먹어본 촌놈. 대학에선 회화, 대학원에선 조각 전공. 신문사에서 시사만화를 그렸고 애니메이션 제작회화를 차렸다가 쫄딱 망함. 대학에서 애니메이션 강사를 하다 미국으로 유학 떠남. 뉴욕에서 미술작업을 시작. 한국에 전시하러 왔다가 눌러앉음. 정치인 풍자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다니다가 3번 기소되어 법정투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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