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석의 가르치다-배우다]군사적 교육(35호)

2014년 3월 27일culturalaction

군사적 교육

강정석 / 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장, 영상원 강사

sweetreal@naver.com

얼마 전, 신한은행 신입생 연수 때의 영상이 큰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체육관 안에서, 강압적인 분위기 아래 선배 직원이 후배 직원을 기마자세로 고정시키고, 팔을 뻗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인정신’ 글귀를 큰 소리로 수차례 읽게 한 것이다. 남녀직원 할 것 없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주인정신’과 지속적으로 강압적 분위기를 유지하며 후배들을 ‘갈구는’ 선배 직원들의 풍경. 결국 몇몇 직원은 탈진해서 나가떨어지고, 선배들은 그런 후배들에게 실망하고…… 더욱 그로테스크한 것은 이것을 마치 ‘다큐멘터리 3일’ 형식의  포맷으로 촬영하며 글로벌 리딩 뱅크가 되기 위한 신한은행 직원들의 악전고투로 미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최근 수원 K 대학 ‘국제캠퍼스(이 정도면 어딘지 대충 알 것이다)’ 체육학과에서도 강압적 얼차려가 지속된다는 제보가 네이트 판을 통해 올라왔었다. 제보자가 올린 카톡 대화방을 보면 가관이다. 이는 묘사보다는 직접 보는 편이 더욱 나을 것이다.
전국의 수많은 예체능계열 학과들의 이러한 사례들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고백컨대 나도 그런 ‘공모자’ 중 한 명이었다. 2학년 선배가 되었을 때도 그랬고, 선배가 되어 학생회장을 할 때도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부끄럽지만, 나 스스로 이를 ‘필요악’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당시 학과의 교수님들도 마찬가지로 ‘알면서도 묵인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문화를 만드는 데 연루되었을 것이다. 연극을 만들고, 영화를 만들 때 더욱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분위기를 이끌기 위해서는 위계질서가 잘 잡힌 ‘조직문화’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재미있게도 이는 실제 영화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참여했던 모 영화의 PD가 스탭들 다 보는 앞에서 제작부에게 기합주고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는 짓거리도 연출했었으니까. 나 역시 침묵하며 그에 공모했다. 정말이지 부끄러운 과거다.
어찌되었든 군대와 학생회, 영화현장 등에서 보았던 위계적 조직문화의 심장을 관통하며, 그리고 수많은 괴물들이 만들어지고 또 다른 괴물들이 부서지는 살풍경을 보며,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많은 책을 읽고 자유로운, 그리고 때로는 ‘급진’적이며 실천적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 스스로를 많이 반성했었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앞으로 괴물이 되어버리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정말 내가 괴물이 아닌가의 여부는, 여전히 나 스스로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저 신한은행의 선·후배 직원들, 그리고 수원 K대 체육학과의 학생들은 이미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글로벌 리딩 뱅크를 만드는 것과 주인의식과 안창호와 얼차려와 강압적 구호가 서로 무슨 연관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군대처럼 머리를 단속하며 수업이 없는 날에도 왜 출석체크를 하고, 아울러 화장도 못하게 하고 카톡 대화창을 봤을 때 ‘관등성명’을 해야 하며 어길 경우 심한 얼차려 및 기타 폭력행위가 체육교육과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학과 직장, 두 곳에서 자행되는, 강압적 파토스 아래 하나로 똘똘 뭉쳐진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무언가 현재 한국사회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저들은 수많은 경쟁을 이겨내고 저 자리에 진입한 것 아닌가. 저 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수많은 청춘들이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청춘들 자신들이 선배가 되면 충분히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이들과 잠재적 괴물들의 조우.
어쩌면 초등학생 때부터 이러한 ‘괴물성’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병대 캠프에서 화생방 훈련을 하며 눈물을 짜는 초등학생의 경험은 훗날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는 정말 초등학교 때부터(어쩌면 더 어린 나이부터) 그들에게 스스로 ‘괴물’이 되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의 잔존하는 군사문화는 이미 ‘교육’이라는 외피를 통해 드러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려서부터 폭력에 너무 단순하고 무심하게 되었다. 공동체의 위계질서 유지를 위한 폭력이 버젓이 자행되고, 그것이 공동체의 미학으로 승화되며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는 순간, 폭력은 차라리 하나의 주술행위이자 거대한 제의처럼 기능한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즉 그 집회를 통과해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한은행과 K대학의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를 ‘군사적 교육’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군사적 교육이 하나의 제의가 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제의를 통과해야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의 결과는 거대한 위계질서의 유지와 구성원들의 자유에 대한 구속·복종의 일반화, 그리고 광범위한 폭력의 정당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구조적 폭력은 사라지지 않은 채 지속된다. 가정, 학교, 학원, 대학, 직장 할 것 없이 폭력은 그 자체로서 이미 구조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구조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이것이 바로 ‘군사적 교육’의 특징인 것이다.
일상 속에서의 훈육과 규제, 규율.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게 내버려 두는 것. 신체형에서 점점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으로 이동해 가는 것. 푸코가 이야기했던 근대적 권력의 미시적인 작동 방식이다.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혀 ‘근대’적이지 않은 순간을 목도하고 있다. 신체형은 일종의 공동체적 질서를 바로잡는 전근대의 통치술이 아니었던가? 집단적 광기와 감금, 신체형, 신앙과도 같은 공동체를 향한 비정상적 충성. 이는 어느 중세 암흑시대의 자기 등에 채찍을 치며 고행을 하는 수도사들의 끔찍한 집회를 떠올리게 한다. 신한은행과 K대학의 사례는 이러한 집회의 현대적 풍경이 아닐까? 아울러 ‘군사적 교육’이 일반화된 한국사회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이러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역시 현대 자본주의(혹은 신자유주의)가 낳은 기형적 산물인 것일까? 모든 것이 유동적인 불안적한 흐름들 속에 위치한 주체가 안정감과 소속감을 찾기 위한 분투의 과정에서 어쩌면 폭력은 당연한 필수적 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암울하기 짝이 없지만, 이 두 가지 사례는 우리로 하여금 한국사회가 여전히 체계적으로 폭력을 구조화시키는 교육을 자행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분명한 징후이자 경고이다. 이와 같은 교육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구조적 폭력을 내재화한 잔인한 세대들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마주한 것일 수도 있겠다. 일베의 등장과 세력화, 포털사이트의 잔혹한 악성 댓글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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