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다방]현재를 현전으로 변형시키는 리듬분석가(19호)

2013년 6월 6일culturalaction

[책다방]19호

 

현재를 현전으로 변형시키는 리듬분석가

–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분석> – 

 

이성혁(문학평론가)

 

앙리 르페브르의 유작 『리듬분석』이 출간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제목부터가 나의 흥미를 끌었다. 시 이론서라고 한다면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을 것인데, 도시 및 공간이론과 일상생활 이론으로 저명한 사회철학자인 르페브르의 저작 제목이 ‘리듬분석’이라고 하니,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소개문을 조금씩 접하면서, 아니나 다를까 일상생활의 시공간 속을 관통하고 있는 리듬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어떤 리듬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생리적인 리듬뿐만 아니라 행위 역시 리듬을 통과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리듬을 분석할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리듬은 삶에 용해되어 있어서 분석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는 말의 리듬을 전경화하기 때문에, 곧잘 리듬 분석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음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다. 그러나 생활의 수준에서 창출되는 리듬은 분석 대상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사회나 생활의 리듬을 전면적으로 분석한 책이 있는지? 그런데 말년의 르페브르는 미개척 영역에 과감하게 투신하여 이 책을 남겨놓은 것이다.

이 책이 어떤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더욱 읽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 서평회의 참여를 계기로 생각보다 이르게 통독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받았을 때, 작은 책이어서 안도(?)했지만, 통독해보니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이 책은 세계에 대한 본격적인 리듬분석을 위해 밑그림을 그린 책이라고 생각된다. 르페브르는 독자에게 묵직한 과제를 안겨주고 생을 떠난 것이다. 조명래 교수가 「해제」에서 말하듯이 이 책을 아무리 정독해도 “사회적 공간에서 표출되는 리듬이 실제 어떠한 것인지는”(14쪽) 잘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도 이 책의 난해성을 더한다. 한편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리듬을 감지는 하지만 그 리듬이 어떤 것인지 말하자면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인데, 리듬에 대해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어려운 문제들이 속출해서 나오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르페브르는 이 어려움을 단순화하여 풀어버리지 않고, 리듬분석을 위해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문제꾸러미를 던져준다. 그러나 이를 통해 독자에게 어떤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이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르페브르는 우리에게 2장의 제목이기도 한 ‘리듬분석가’로서 살기를 제안한다. 그런데 우선 리듬분석가는 왜 리듬분석을 하는지에 대한 르페브르의 생각부터 찾아보아야겠다. 리듬분석의 목적에 대하여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리듬분석의 목적은 각각의 리듬을 분리함으로써 무엇이 ‘자연’에서 왔으며, 무엇이 후천적인 것, 관례적인 것, 정밀하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있다. 이 어려운 분석은 ‘윤리적’, 즉 실천적인 영역까지 포괄한다. 다시 말해, 체험의 지식은 지식 없는 체험을 변형시키거나 다른 것으로 탈바꿈시킬 것이다. 여기서 예전과 동일하지만 다른 각도로 조명된 변형의 사유가 재등장한다.(86쪽)

“다른 각도로 조명된 변형의 사유”를 하는 리듬분석가는 그렇게 얻은 “체험의 지식”을 통해 “체험을 변형시키거나 다른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리듬분석가는 “각각의 리듬을 분리”하여 그 성격을 탐구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리듬분석가의 작업 방식이다. 르페브르는 리듬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리듬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하지만 리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리듬들을 파악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면 안 된다. … 하나의 리듬을 붙잡기 위해서는 먼저 그 리듬에 붙잡혀야 한다. 그 리듬의 지속에 고스란히 몸을 내맡기도 ‘되는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106-107쪽) 리듬분석가는 세계에 몸을 맡기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내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외부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108쪽)) 여기서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이 리듬분석가와 벤야민의 ‘산책자’를 비교하면 무척 흥미로울 텐데, 둘 다 세계에 삼입되면서도 그 세계와 거리를 두는 역설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 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그러나 산책자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걷고 있다면, 리듬분석가는 발코니에서 거리를 조망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아무튼 리듬분석가는 세계의 리듬에 붙잡히면서 ‘체험의 지식’을 얻는데, 그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은 프로세스”는 “현재를 고립시키지 않고 ‘주체’와 ‘객체’, 주관적인 상태와 객관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그 모든 다양성 속에서 현재를 ‘살기’ 위해서”(127쪽) 행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리듬분석가는 객관에 함몰되지도 않고 주관으로 도피하지도 않는다. 그는 객관의 리듬과 주관의 리듬이 융합되는 가운데 다양한 리듬의 존재를 분석하고, 또한 그 리듬들에 정동되면서 살아간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사물은 “그냥 연속적으로 지나가 버리는 순간들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시간 속에서 연관을 맺는 순간들의 연쇄, 즉 리듬 속에 있”(209쪽)다. 리듬분석가는 이러한 리듬을 포착하면서 “‘대상들’을 다리듬적으로”(115쪽) 볼 수 있게 한다. 세계는 ‘다리듬적’으로 존재한다. 살아있는 몸부터가 “다양한 리듬들로 구성”된다. “몸의 각 ‘부위’, 기관 혹은 기능은 고유의 리듬을 지니며, 항상적으로 상호작용”(215쪽)하는 것이다. 또한 “몸의 주변, 우주적인 것뿐 아니라 사회적인 것도 리듬들의 꾸러미”(216쪽)인 것이다. “지각되는 것, 즉 사물들, 주변, 타인들을 향하는 ‘지각하는 자’의 유기적, 심리적, 사회적 통일성 속에서 그 통일성을 구성하는 리듬들이 드러”난다고 할 때, 리듬분석가는 이러한 꾸러미들의 “각 리듬들을 구별하고 비교하기 위한 분석 작업”(210쪽)을 행한다. 이때 분석가의 몸은 “생체적인 것, 생리적인 것(자연), 사회적인 것(자주 ‘문화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는)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중심, 장소”(218쪽)가 될 것이다.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은 맑스주의자로서의 실천 기획이기도 하다. “이 책은 단호하게 좌파적 비판의 편에 선다.”(63쪽)고 그가 말하고 있듯이, 그의 리듬분석은 일상생활을 조직하는 자본주의와 ‘스펙터클-시뮬라크르’ 문화에 대해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기관차가 시동, 전진, 후진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과정은 볼 수 없”듯이 “가시적인 기구들은 그 속의 장치들을 숨기고” 있는데, 리듬분석은 그 비가시성을 투시하여 사물들이 “시간 속에서 연관을 맺는 순간들의 연쇄”-리듬-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것은 “생각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82쪽)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우리 현대인이 살아가고 있는 ‘미디어화한 일상’은 “일상이 미디어에 의해 포획되고, 기구들이 만들어낸 ’수단들‘에 의해 이용되면서 동시에 무시당하고,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무관심 속에 버려진다는 사실”(155쪽)을 말해준다고 할 때, 리듬분석은 미디어라는 매개의 막을 찢고 실재와 접속하고 그에 정동되면서 실재의 리듬을 분석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르페브르는 ‘현재’와 ‘현전’의 구별이 핵심적이라고 말한다.(이 구별은 2장과 5장에서 자세하게 논의되고 있다.)

현재는 현전의 외양을 취하며 사회적 실천 속에 시뮬라시옹(시물라크르)을 주입한다. 현재는 살아 있는 것을 따라하거나 감추면서 시간을 채우고 점령한다. 이마주리(화상, 사진 영상)는 현대에 와서 시간의 신성화, 즉 의식과 장엄한 제스처들로 채워진 시간을 대체했다. … 이미지 속에는 이데올로기가 스며들어 있다. 이미지는 이데올로기를 지니면서 동시에 은폐한다. 현전성은 (저 위 혹은 저 먼 곳이 아니라) ‘여기’ 있다. 현전에는 대화, 시간의 사용, 말과 행위가 뒤따른다. 그러나 ‘저기’ 있는 현재에는 교환, 생산물과 시뮬라크르에 의한(‘자신’ 혹은 ‘타자’의) 이동과 교환의 수용만이 있을 뿐이다. 현재는 하나의 사실이자 ‘거래’의 결과다. 반면 현전성은 시학詩學 속에 자리잡는다. 현전성은 교환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 세계 내 가치, 창조, 상황 등과 관계한다.(147~149쪽)

이와 관련하여, 르페브르는 다른 곳에서 “이미지는 그것이 미치는 (그리고 그것이 재생한다고 주장하는) 대상을 사물로 변형시키며, 현전성을 시뮬라크르로, 현재로, 이것으로 변형시킨다”면, “현전성은 불쑥 출현하여 리듬(시간)을 부여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96~97쪽)고 말하고 있다. 하여, “리듬분석의 제스처는 본래대로 포착되고 인지된 ‘현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현전으로 변형시킨다”고 한다. 미디어의 시뮬라크르에 의해 현전이 현재로 변형되어 사물화 된다면, 리듬분석가는 그 현재에 가려진 현전을 다시 들추어내어 사물들의 현재를 박동하고 있는 현전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시뮬라크르의 이미지에 의해 현전을 사물화하면서 나타나는 현재는, 물론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리듬분석과 관련하여 자본의 속성을 분석하고 있는 6장에서, 르페브르는 삶을 물화시키고 있는 자본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다. “삶의 시간에 대한 경멸 위에 세워지고 자리 잡은”(159쪽) 자본은 삶을 가장하면서 삶을 죽이고, 사회적 부를 파괴한다. 이 “하나의 실체, 괴물처럼 무시무시하고, 매우 구체적인 동시에 매우 추상적인” 자본은 “매우 효율적이고 활동적인 괴상한 존재”(164~165쪽)다. 세계를 물화하는 실체인 자본은 모든 것을 생산하고서는 파괴하는 고유의 리듬을 가진다. 이 자본의 리듬은 사람들의 리듬을 ‘조련’하여 그들을 무감각하고 기계적인 반응만을 보이면서 “군가 박자에 맞춰 유쾌하게 운명적인 최후를 향해 걷고 있는 인간 종”(167쪽)으로 변모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를 현전으로 변형시키는 리듬분석은 인류의 미래와도 관련 있는 작업이다. 그것은 자본이 조련한 삶의 리듬 ― 삶을 파괴하는 ― 으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삶의 리듬을 창안하는 데 일조한다. 새로운 리듬의 창안, 그것은 시인이 하는 작업 아닌가? 르페브르 자신도 리듬분석가는 넓은 의미에서 시인을 닮았다고 말하고 있다. 사물들을 부동의 상태로 묘사하는 통계학자와는 달리, “리듬분석가는 시인처럼 ‘미학적’ 힘을 갖는 언어적 행위를 수행”하고 “시간성, 전체 속에서 각 시간들이 맺는 관계에 주목”(97쪽)한다는 것이다. 시인 역시 현재의 이미지에 가려진 세계의 현전을 느끼고 발견하는 사람일 것이다. 시인은 세계의 리듬을 감지하면서 정동되고, 이를 말로 변형하여 재배치하면서 새로이 리듬을 창안한다. 그리고 그 리듬 꾸러미 ― 시 ― 는 세계로 다시 투입될 것이다. 리듬분석가 역시 시인처럼 “확인한 것을 변형시”키며, “그것을 운동 속에 투입하며 그것의 힘을 인식한다”(102쪽)고 한다. 그런데 이로써 그는 “이 사회의 ‘혁명적’ 변형을 일부분 수행할 수”(103쪽) 있다. 르페브르는 객관적으로 혁명의 변화가 가능하려면, “하나의 사회적 집단, 계급 혹은 카스트가 개입하여 힘으로 혹은 설득을 통해 동시대에 하나의 리듬을 새겨 넣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의 그룹이 ‘혁신자’ 혹은 ‘의미의 생산자’로 자처하고 나서 ”그 행위들이 ‘현실’ 속에 기입되어야“(78쪽) 한다는 것이다. 혁신적인 리듬을 동시대에 새겨 넣는 이러한 혁명적 작업은 리듬분석가의 ‘변형’ 작업에 힘입을 수 있을 것이다.

혁신적인 리듬을 창안하고 세상에 새겨 넣기. 이 작업은 시인의 작업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새로운 리듬의 창안이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 과정을 「꽃잎 2」에서 보여주려고 했다고 생각된다. 이 시를 읽어보면서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꽃을 주세요 우리의 苦惱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時間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偶然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다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싫은 노란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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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반복 변환되는 리듬을 통해 변환되는 이 시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본다. 1연을 보면, 화자는 “꽃을 주세요”라는 부탁을 주술적으로 반복한다. 꽃을 왜 달라고 하는가? 역시 반복되는 구절인 “-을 위해서”다. 꽃은 ‘고뇌’와 “뜻밖의 일”과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필요하다. “고뇌 ― 뜻밖의 일 ― 아까와는 다른 시간”은 환유적으로, 그리고 점층적으로 연결되면서 꽃의 존재 필요성을, 그 의미를 증폭시킨다. 그와 동시에 반복되는 문장 및 구절이 만드는 리듬을 고조시킨다. 그런데 꽃을 시라고 본다면, 시는 새로운 어떤 순간을 얻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꽃은 뜻밖의 일 ― “아까와는 다른 시간” ― 을 가져오기 위해, 새로운 생각(고민)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2연에서 보듯이, 시는 그 자체가 완성된 무엇이 아니고 이행의 상태를 보여주는 무엇이다. 2연은 1연을 변주시켜 역시 같은 문형을 반복 변환시키고 있다. 하지만 1연과는 달리 ‘-져가는’의 반복이 개입되면서 좀 더 리드미컬해진다. 그리고 1연의 꽃은 ‘노란 꽃’으로 좀 더 구체화된다. 그 구체화는 존재의 상태 자체에서도 이루어진다. 모든 존재는 겉보기와는 달리 그대로 존재해 있지 않다. 무엇인가로 이행하는 운동 중에 있다. 노란 꽃 역시 그대로 노란 꽃이 아니라 “하얘져가는 노란 꽃”이다. 이행 중인 꽃이기 때문에 ‘금이’ 가 있다. 지금 상태가 파열되지 않는다면 다른 상태로의 이행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노란 꽃은 변화 중에 있으므로 ‘넓어져가는 소란’ 자체이다. ‘노란 꽃-시’는 소란 자체, 넓어져가는 움직임 자체다. 이 소란을 혁명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3연에서는 ‘주세요’가 ‘받으세요’로 변환되어 반복된다. 그리고 1연의 ‘-를 위해서’가 다시 반복된다. 왜 이 소란 자체를 받으라고 하는가? 그 필요성은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1)->“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2)->“거룩한 偶然을 위해서”(3)로 변환되면서 제시된다. 그런데 1연에서는 꽃의 필요성들이 의미가 증폭되면서 제시되었다면, 여기서는 (1)과 (2)와 (3)이 낯설게 병치된다. 그리고 이 병치는 (3)의 ‘우연’과 호응한다. 1연의 반복되면서 증폭되는 리듬이 여기서는 다소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3연을 앞에서 본 바와 연결시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시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이다. 원수를 지우는 혁명을 위해서이다. 자유를 막고 있는 현실의 세력을 지우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또한 시를 받는 일은 결국 자유가 억압된 상태에 빠져 있는 우리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기 위한 뜻밖의 사건의 도래를 위해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얽매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의 상태로 돌입할 수 있다. 필연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거룩한 우연”을 살아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4연에서 보듯이 꽃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4연은 3연까지의 반복 구조와 다소 다른 반복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3연까지는 한 행에 두 문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4연에서는 한 문장이 한 행을 이루고 동일 문형이 격자식으로 삽입되며 반복된다.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라는 문장이 동일하게 반복되고 그 사이에 낀 문장들은 “꽃의 -가 -게”라는 문형이 반복되면서 변형된다. 그런데 이는 3연과는 다른 변형을 보여주는데,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not A)->“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B)->“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A)”와 같은 식이다. 상호 모순적인 not A와 A는 B를 매개로 등치된다. 모순율의 공존은 주술적인 리듬 속에서 뫼비우스 때처럼 꼬인 리듬, 엇박자를 창출한다. 이를 해석해보면 이렇다. 시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선입관을 버리고 그 시 자체로 읽어야 한다.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말이다. 그래야 “넒어져 가는 소란”인 시가 내는 소음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소음을 들음으로써 시의 글자가 비뚤어져야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이행의 순간이자 행위인 소란을 시에서 읽어낸다면, 다시 말해 시에서 자유를 읽어낸다면, 시의 외연은 다시 다른 내포를 갖는 것으로서 ‘비뚤어지게’ ― 소음 속에서 ― 읽힐 수 있다. 이 전 과정은 시를 “찾기 전의 것”들인 선입관이 지배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

이렇게 읽으면 이 시는 마지막 행에서 언급된 “보기싫은 노란 꽃” ― 소란으로 이행하게 하고, 우연으로 이행하게 하고, 그리하여 자유로 이행하게 하는 행위로서의 시 ― 에 대한 시인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비록 그 시가 “못보는 글자”, “영원히 떨리는 글자”일지라도, 이 시라는 존재를 믿으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이로써 김수영은 시가 가진 힘을 시로써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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