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를 이해하기 위하여]그들 각자의 사진첩(19호)

2013년 6월 6일culturalaction

[JPG를 이해하기 위하여]19호

 

그들 각자의 사진첩

 

임효진

 

노트북이 너무 버벅거린다. 내컴퓨터에 들어갔더니 로컬디스크 575GB 중에 이제 남은 용량아 4 쩜 몇 기가바이트란다. 하드를 정리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막막해서 매번 미루다가 오늘은 외장하드 연결잭을 찾은 기념으로 큰 맘먹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맨 먼저 들어간 폴더는 영화랑 드라마가 들어있다. 아직 보지않는게 태반이라 지우기 아까우니 패스, 시리즈별로 모아둔 것들도 그간의 노력이 가상해 일단 외장하드로 몇 개 옮겨 담는다. 아 이건 또 왜이렇게 느린가. 냉장고에 다녀와야겠다. 장에 활력을 더해줄 요구르트를 마시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도 여전히 전송중이다. 벌써 약간 지친다. 그 다음은 음악 폴더. 음악폴더는 나름 정리가 잘 되어있다. 가수별 앨범별 장르별. 뿌듯한 미소를 지우며 창을 닫는다.

사진폴더를 열자마자 헉 소리가 절로 난다. DSC어쩌구로 시작하는 파일들이 각자 미리보기를 띠우느라 노트북이 앓는 소리를 낸다. 디카로 찍은 사진, 폰카로 찍은 사진, 스크롤바를 내리다 보니 교복치마 입고 말뚝박기 하던 시절의 사진도 나온다. 나는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교복입은 내 모습 뒤로 모니터에 비친 현재의 내 얼굴이 겹쳐진다. 눈밑에 저것이 전부 다크서클은 아닐것이야. 갑자기 오만가지 잡 생각이 밀려든다. 어머니 퇴근 전에 설겆이 해놓고 빨래 한번 돌리고 나가야하는데 아고 귀찮아라. 오늘 점심은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먹어야지. 머릿속에 새로운 창을 여러개 띄워놓고 있다가 다시 모니터앞으로 돌아와 수 만장의 사진이 담겨있는 폴더의 좌측 상단의 뒤로가기 버튼을 살포시 눌렀다. 아무래도 추억들을 정리하는 일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내폴더에는 여기저기서 저장한 온 세상의 JPG들과 그 친구들이 담겨있다. 이쁘고 잘생긴 것들과 사고싶고 사야하지만 불가능한 것들과 학부생 시절에 울면서 쓴 레포트들이 촤르륵 펼쳐진다. 좋아하는 연예인 구글링해서 마구잡이로 저장하는게 취미이자 특기인지라 내폴더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돌들이 나를 보고 웃는데 정작 나는 별로 달갑지가 않다. 이 폴더는 너무 애매하기 때문에 다음에 정리하기로 한다. 사실은 눈이 너무 아프다. 시계를 보니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예전에는 사진을 저장하는 방식이 지금보다 심플했던 것 같다. 물론 필름 한롤한롤을 현상과 인화라는 지불의 과정을 거쳐 사진첩에 붙이고 하는 것은 번거롭다면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퇴근길에 뽑아온 여행 사진을 가족들이 쭉 돌려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저녁시간은 따듯했고 친척들이 나온 사진은 따로 모아두었다가 다음번 만남 때 뉘집 아들인지 잘나왔네, 라며 생색을 낼 수도있었다. 왕래와 모임속에 사진이란건 사소하지만 즐거운 공유의 대상이었다. 또 공들여서 완성된 그 사진첩은 무척 크고 육중해서 어디 구석에 잘 모셔놓았다가 새로 사귄 친구나 애인을 집으로 불러놓고 어색해지면 한 번씩 꺼내보고 함께 깔깔댈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지 말이다. (절대 보여주지 말아야할, 영구폐기를 요하는 사진들이 중간중간 자리하고 있을지 모르니 미리 검열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릴 때 집에 불이나서 우리집은 사진이 없어.아주 친했던 친구가 슬픈 얼굴로 내게 했던 말이다. 요즘 아이들도 그럴까. 요즘 아이들은 원래 사진이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진은 4X3사이즈로 인화된 스냅사진을 말한다.) 아직 중학교에 다니는 내 동생을 보면 수련회와 같은 중한 날에 찍은 단체사진은 여전히 날짜와 장소를 박아서 일년에 한 두 장씩 나누어 주는 것 같지만 내 동생의 어린 시절을 담은 크고 육중한 사진첩은 내 것처럼 따로 있지 않다.

JPG의 전성시대가 되면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큰맘먹고 일제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했다. 하지만 그 초창기에 찍은 사진들은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예전에 고장난 버린 데스크탑 본체에서 길을 잃었다. 이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 자체가 변화했고 그 감각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은 비싼 취미로 여겨지는 것 같다. 시와 소설이 시간성을 무한으로 되돌리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박제되는 디지털기호- 사진과 영상은 태어남과 동시에 실현불가능의 영역이었던 ‘영원’을 선고받는다. 디지털코드로 하드에 저장된 이미지의 존재론은 인화된 코팅종이가 습도와 온도에 반응하며 인간의 시간을 견디는 일과 아예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제사 장당 200원에서 300원을 주고 컴퓨터속의 JPG를 현실로 소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 스마트폰에서 무한으로 증식하는 셀카사진말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 말고, 책상 유리 밑에 깔아놓을, 혹은 가끔 꺼내서 한 장 한 장 넘겨볼 사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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