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인 것들]왜, 지금 ‘사회적인 것’을 이야기 하려 하는가?(34호)

2014년 3월 11일culturalaction

왜, 지금 ‘사회적인 것’을 이야기 하려 하는가?

양기민/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sis@noridan.org

지난 달 쓴 칼럼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또 어떤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솔직한 이야기도 들었다. 변명하자면 필자도 여러 가설을 설정하고 있는 진행형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이 주제를 기획하고 있는 지, 우선적으로 고민을 전달해야 할 것 같다.
지난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사회적(기업), (경제)’란 표현이 방송, 정치권에서도 흔히 쓰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의 그 ‘사회’가 과연 모두가 동일한 ‘사회’ 혹은 공유하고 있는 ‘사회’라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지 의심하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언제부턴가 ‘사회적 the Social’이 단어가 여러 조합 형태로 쓰여졌다. 정책적인 용어(‘사회적’기업 등등)에서부터 마케팅적인 용어(‘소셜’ 커머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사회’가 차용 되고 있다. ‘사회적경제’, ‘사회적책임’, ‘사회통합’, ‘사회안전망’, ‘사회적자살’, ‘사회적예술’, ‘소셜 네트워크’, ‘소셜벤처’, ‘소셜펀딩’ 등등. 이러한 ‘사회적’이란 라벨을 붙인 용어의 발생은 새로운 담론이거나 혹은 한때 유행처럼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라캉을 흉내 내면) 실재사회의 실패 혹은 결핍으로 인해 사회를 대체하거나 보완하기 위해 ‘사회적’이란 언어가 ‘상상계’ 혹은 ‘상징계’ 로 사용되고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사회적’이란 개념의 결합효과

‘사회적’이 결합될 경우, 비교적 명료한 개념이 모호한 개념으로 이동하며 해석의 다성성이 부여된다. 예컨대 경제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먹고살기를 위한활동’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경제’라고하면 먹고살기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의미로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물론 모든 조어가 개념적 혼란을 가져오며 형용사는 명사를 꾸며주는 역할을 하고 다소 의미 변화를 수반한다. 하지만 ‘사회적’이란 개념은 단순히 꾸며주는 역할만을 하지 않는다. 또한 조작적 정의로 단순화 하기도 어렵다. ‘사회적’이란 말은 구체성이 아닌 추상성을 부여하며 마치 동의를 전제로 한 합의 해야 할 것 같은  마술적 효과를 가졌다. ‘문화’와 ‘예술’도 비슷한 효과를 발생하지만 ‘사회’적인 것의 특수성은 발화자와 해석자가 입장과 맥락에 따라 해석의 차이를 은폐시킨다. 특히 ‘정치’를 내포하지만 정치가 배제 혹은 분리된다. 문화정치, 정치예술은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사회정치, 정치사회는 동어 반복처럼 어색해 보인다.
‘사회적’이란 말은 불안한 혹은 경제구조에 의해 전면적으로 부정되기도 어렵다. 사회적은 필요한 것 혹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별 의심 없이 마치 윤리적인 차원(예를 들어 사회적책임 처럼)에서 사용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도덕적’이어야 할 것처럼 당연히 ‘사회적’이어야 하고 사회적인 것은 선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는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란 말처럼 인간과 사회가 필연적이다고 받아들이지만, 한나 아렌트는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란 말은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빚어진 실수였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동물’이라고 말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성이 아니다. 꿀벌과 개미도 사회 시스템을 통해 군집생활을 한다. 비록 다른 생명체들의 ‘정치적’인지 혹은 ‘본능적’인지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단지 같이 사는 것만으로 사회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적이란 말 속에서는 마치 같이 살아야만 한다는 의무를 강조한다.

유동하는 사회적인 것들

사회는 인간을 위한 특수한 개념이 아닐 뿐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로빈슨크루소가 무인도에서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사회 구조가 아니라 개인적 인 친밀한 관계에 대한 욕망이었다. 사회란 선택 불가능하거나 고정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렵다. 사회가 선택적일 수 없거나 변화가능성이 없다면 우린 이 지긋지긋한 사회에서 평생 살아야하며 진보라는 개념성립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고정불변하지 않고 단일하지도 않고 유동하듯 흘러내리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이란 개념도 선택적이고 비고정적이고 단일하지 않아 해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회는 ‘우리 사회’라는 방식으로 통합을 전제한다. 이는 사회를 통해 차이와 갈등을 봉합하거나 마치 합의되어야 한다는 착각을 가져오게 한다(예를 들어 사회통합). 이러한 착각을 알튀세르 개념을 빌려오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작동한 증거이다. 이러한 전제들은 국가가 사회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여 통치하는 방식으로 활용될 때 주로 발견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가 조차 ‘상상의 공동체’라 말했지만 근대이후 현재는 영토를 기반 한 국민 국가체계는 이미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사회와 국가는 혼동되고 있으며, ‘사회’는 국가의 권력 아래 ‘상상의 공동체’들의 장소화하며 투쟁하는 장을 의미한다.

‘사회적인 것’들을 연구하는 이유

앞으로 사회보다는 사회적인 것에 더욱 주목할 예정이다. 이는 사회란  역사적 기획의 축적된 구조이자 결과물이기에 현상으로 바라보기는 어렵다. 비평이란 현상을 통해 의미화하는 작업이고 이를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사회’ 보다 ‘사회적인 것’을 질문하고 해석하려 한다. 이는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불가능한 작업에 도전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이란 개념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 지 그 용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나는 지금 우리 혹은 그들의 사회에서 ‘사회적’이란 개념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며 소비되고 있는지를 탐구하려한다. 이것은 우회적인 방법이 아니다. 스튜어트 홀은 문화연구에서 담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담론이 시대와 맥락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는 지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했다. ‘사회적’이란 개념을 국면적 해석을 통해 다시 ‘사회’를 의미화하며 재구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 연구가 개인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필자 역시 현재 ‘사회적경제’ 영역에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도 ‘사회적’이란 개념은 중압감으로 다가올 뿐 아니라 모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사회적’이란 개념에 대한 이론적 질문을 통해 이후 실천적 영역을 발견하고자 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진행 중인 상태의 연구작업이 때론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고, 입장에 따른 개인적 해석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험한 이론화 작업을 시도하는 이유는 개인적으로는 사회적경제 등 사회적인 것들이 본질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목표로 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인 것들에 대한 무비판적이거나 관습적 수용태도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들에 대한 의심과 성찰을 통해 우리 사회가 새롭게 재구성되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앞으로 독자들도 사회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기를 부탁드린다.
사회적인 것들
이 칼럼에서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 들에 관해 이야기 하려한다. 사회라는 통합체 안에서 발생하는 정치, 경제, 문화적 현상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작업이다. 특히 사회적이라 지칭하는 다양한 담론들의 발생, 유통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것’이 어떻게 해석, 소비되고 있는지 관찰한다. 이러한 과정의 연장선에서 유동하는 현대 사회를 인식적 재구성하며 실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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