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로운 덕후의 우울]사랑스러운 못난이들에게(33호)

2014년 2월 25일culturalaction

사랑스러운 못난이들에게

최지용

(hohobangguy@hanmail.net)

얼마 전 밸런타인데이에 할리우드의 배우 엘렌 페이지(Ellen Page)가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했다는 사실을 기사로 접했을 때, 나는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 벅찬 기분을 느꼈다. 그녀를 정말 좋아하는 팬으로서 그녀가 살아온 삶이 어렴풋이 짐작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며 그녀가 느꼈을 고통과 두려움, 소외감 같은 감정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켜온 따뜻하고 아름다운 감정들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녀의 연설 영상을 유투브에서 찾아보았는데, 단상에 선 그녀는 따뜻하고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다.
커밍아웃을 하는 다른 모든 이들을 지지하지만 유독 엘렌 페이지의 커밍아웃에 더 관심을 가지고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은 내가 그녀의 엄청난 팬이기 때문이다. 영화 <주노>를 통해 처음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만이 가진 독특한 캐릭터에 금방 매료되었다. 그녀는 작고 아담한 체구에 귀여운 외모를 지녔지만 소탈하고 시원스런 성격을 가졌으며, 록음악과 B급 슬래셔 무비(slasher Movie), 일본 망가를 좋아하는 등 오타쿠 같은 취미를 가진 당찬 소녀로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사회가 부여하는 규범에 명랑하게 반기를 드는 독특한 소녀였기에 나는 마음에 들었다. 사회적인 미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규범을 해체하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마이너리티의 정서를 가진 매력쟁이, 사랑스러운 못난이들은 한줌의 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 반짝이는 법을 안다. 그리고 나는 종종 ‘사랑스런 못난이’들이 사랑을 통해 혁명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상상하곤 한다.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상상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칭찬받는 성적 좋은 학생이었지만 공부에 흥미를 잃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창의적이지 않고 재미없는 것에 관심을 쏟는 일에 질렸고 세상에는 정말 재밌고 아름다운 일들이 있다는 것을 막 깨닫기 시작한 날들이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편견 같은 것들을 부수고 새롭게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해내는 것은 혁명과도 같은 일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영화관에서, 만화 속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글을 쓰면서 학창시절의 남은 시간들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같은 반 친구들이 나를 조금 대하기 어려운 아이라고 느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는 끝까지 질문을 던져야만 납득이 됐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고, 혹시라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미운오리새끼라고 생각하는 ‘사랑스러운 못난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그런 꿈을 꾸고 있다.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이라는 규범 속에 속하는 사람들은 사실 극소수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인 체하며 살아간다. 내가 ‘정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것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유치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밥 먹는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오른손을 높게 들었고, 나는 왼손을 들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 혼자 왼손으로 밥을 먹는다는 게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어 말하길, “여러분이 지금 든 손이 오른손이에요. 알겠죠?”라고 했다. 그 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오른쪽을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은 틈이 날 때마다 밥 먹는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 밥 먹는 손은 왼손이었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을 곧바로 구분해내지 못한다. ‘내가 자주 쓰는 손은 이 손이고, 이 손이 왼손이니까 이쪽이 왼쪽이겠구나.’하고 머릿속으로 한 번의 사고과정을 거친 후에야 왼쪽, 오른쪽을 구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 운동장에서 ‘좌향좌 우향우’ 구령에 맞춰 돌 때도 친구들이 어느 방향으로 도는지 눈치껏 살핀 후에 같은 방향으로 돌아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길을 알려줄 때에도, 왼쪽, 오른쪽을 한 번에 이해하여 알아듣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밥상에서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한다고 외할아버지께 꾸중을 자주 들었다. 오른손으로 글 쓰는 연습을 꽤 했지만 잘 쓸 수 있는 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이내 그만두었다.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그렇게 경험을 통해 배웠다.
나는 남자 중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남자 아이를 좋아한 적이 있다. 내가 남자 애한테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어려서부터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대한 별다른 편견이 없었던 모양인지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아이는 웃는 모습이 예뻤는데 웃을 때 반달 모양이 되는 눈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틈마다 야한 얘기나 하는 다른 남자애들과 다르게 생각이 깊고 조숙했던 그 아이는 말수가 많지 않았고 책을 자주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야기하기 부끄럽지만 혼자 있을 때 종종 그 아이 생각을 했다. 남몰래 키스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나는 그 애한테 내 마음을 고백했고,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뒤로는 남자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 여자를 좋아했고 지금의 여자 친구와 잘 사귀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바이섹슈얼이나 이성애자 중 하나로 정체성을 규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때는 성별이 남자인 사람을 좋아했던 것이고 지금은 성별이 여자인 사람을 좋아하는 것뿐이다. 나는 그저 나일뿐이고 내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싶은 것이다.
원래 이 모양으로 태어났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과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싸워나가는 것이 사람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런 과정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개인과 사회가 성장해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전혀 납득이 가지 않을 때, 그것이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파괴하고 왜곡시킨다고 느껴질 때는 의문을 제기하고 싸워보는 것이 옳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맞추어 자신을 변형시키고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기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고,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누군가는 지금도 다른 사람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탓하며, 왜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없는지 끊임없이 자책하며 고통 받을 것이다. 이 사회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기란 너무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희망은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빛을 발하고 있고, 조금만 눈을 돌려 주위를 관심 있게 둘러보면 환희로 반짝이는 별들이 여러분들에게 손을 내밀지도 모른다. 세상이 우리들을 고치려 들 때, 우리는 세상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자. 세상이 가진 저열한 상상력으로는 생각조차 못할 멋지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말이다. 우리는 우리들만의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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