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다-배우다]‘배움’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일까(33호)

2014년 2월 25일culturalaction

‘배움’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일까

강정석 / 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장

(sweetreal@naver.com)

‘웃픈’ 이야기 하나로 시작해 보자. 아는 친구가 밤 열시 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왠 중학생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겨우 같이 타고 올라갔던 적이 있더란다. 그런데 그 중학생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세상이 다 꺼질 듯 한숨을 쉬면서 하는 말, “쉬고 싶다.” 아마 그 중학생은 집에 가서도 쉬지 못하고 학원에서 배웠던 걸 ‘복습’해야 하지 않았을까.
경쟁이 모든 사회를 휘감아버린 시대에 위와 같은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일수도 있다. 아마도 위와 같은 사례들을 대부분 누군가에게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즉 위의 중학생은 어쩌면 현재의 ‘일반적인’ 중학생의 일상인 것이다. 혹자는 그 학생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어릴 때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게 너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따위의 조언을 해주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위의 이야기는 더없이 끔찍한 우리네 교육현실을 더없이 잘 보여주는 것만 같다.
아마도 그 중학생은 학교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온 것이리라. 선행학습은 ‘예습’과는 다르다. 예습이 내일 배울 것, 혹은 다음 주에 배울 것을 미리 공부하는 것이라면, 선행학습은 다음 학기, 다음 학년, 심지어 상위교육과정을 선행하여 학습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행학습은 기본적으로 학습의 양이 예습보다 월등히 많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과정을 알아야 하는 것이기에 홀로 수행하기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주로 선행학습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학원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그렇다면 왜 선행학습을 해야 할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불안’ 때문이다. 다른 집 누가 무엇을 한다더라, 어떤 학원에 다닌다더라, 누구한테 과외를 받는다더라, 그 학교에 가려면 적어도 어떤 과정까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더라 등등, 누구나 다 하기 때문에 내 자녀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하기 때문에, 내가 하지 않으면 경쟁에 뒤처진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상황. 역설적으로 누구나 다 선행학습을 하기에, 결과적으로 누구나 다 ‘제자리뛰기’를 하는 형국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처구니없게도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대학에 가려면 선행학습은 이제 필수가 되어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학생들은 어떻게 되는가?
얼마 전 ‘현대판 사도세자 뒤주’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스터디 룸’이라는 이름의 가구인데, 가로 1.1m, 세로 0.8m, 높이 2.1m 크기의 나무로 만든 직육면체 부스에 학생이 들어가 공부하는 것이다. 집에서도 독서실처럼 공부할 수 있는 일종의 ‘가정용 독서실’ 가구인데, 실제로 내부에 CCTV를 달거나 외부에서 잠금장치를 달아 아이들의 공부 감시 및 ‘감금’까지 할 수 있는 가구라고 전해진다.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느덧 공부를 하는 것이 ‘감금’의 수준까지 가버린 것이다.
비정상적인 사교육의 팽창, 계층 간 교육불평등 발생, 학생들의 인성 파괴 등등, 선행학습의 폐혜는 그동안 수차례 지적되어 왔다. 박근혜정부의 주요 교육공약 중 하나가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선행학습 금지’였을 정도이다. 최근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선행학습금지법은 이러한 맥락 아래 놓여 있다. 물론 이 법은 사교육 영역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선행학습에 대한 실질적인 규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등 실효성에 대하여 논란이 있으며 따라서 더욱 많은 부분이 보완이 필요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라도 통과된 것이 조금은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 동안 선행학습으로 인한 폐혜는 너무나도 심각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선행학습은 ‘배움’이 아니다. 단지 상위권 대학 진학의 높은 진입장벽을 깨기 위한 단기적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더욱 심각하게, 이에 본의 아니게 공모함으로써 사회적으로는 그러한 진입장벽을 더욱 공고하게 다지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교육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제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배움’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위 ‘교육 불가능의 시대’라고 불리며 마치 ‘배움’을 위한 공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 교육의 냉정한 현실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다-배우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조망해보는 시도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동안 대안교육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해 왔던 활발한 시도들, 공교육 내부에서 일어났던 혁신학교의 새로운 가능성들, 다양하고 재미있게 펼쳐진 문화예술교육의 상상력들, 최근 새롭게 등장한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배움의 공동체들이 더없이 소중한 이유이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들이 모여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깨지지 않을 것처럼 공고한 한국의 경쟁적 교육 현실을 바꿔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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