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무대연구소 일지] 오픈포럼 ‘다원예술의 현황과 전망’을 보고 끄적거리다 (16호)

2013년 4월 23일culturalaction

오픈포럼 ‘다원예술의 현황과 전망’을 보고 끄적거리다

 

 

송현민 (이런저런무대연구소 소장)

대학로에 있는 예술가의 집 다목적홀로 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에서 개최하는 ‘다원예술의 현황과 전망’이 있는 날이었다(4월 11일).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왔다. 1부는 연구보고서 발표였다. 주황색 표지의 보고서를 나눠줬는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실험적 예술 및 다양성 증진 지원사업’ 이하 ‘실다지’라고 적혀 있다. 책자에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의 다원예술의 현황에 대한 통계 분석표가 대부분이었다. 1부의 전반부는 유병진 연구원(독립기획자)의 발표. 그저 보고서를 읽는 수준이었다.

1부 후반의 지정토론. 이승엽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사회를 봤다. 관객석에 평소 다원예술 관련으로 다양한 글을 쓰는 신민경 연구원(기획자)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물론 친분은 없지만 난 그녀의 해외사례 기사를 꼬박꼬박 읽는, 나름 ‘팬’이다). 귀에 들어왔던 것은 이철성 연출가(비주얼씨어터 꽃 대표)와 김소연 평론가가 주장한 다원예술에 있어서 비평의 중요성이었다. 이철성 연출가는 ‘독립예술창작포럼’을 진행해온 이. 1년차에는 거리예술을, 2년차에는 무브먼트 위주의 공연을 진행했지만 그때까지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

고, 3년차부터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 흐름을 이어 올해부터는 독립예술웹진인 ‘인디언밥’과 공동으로 진행할 예정이란다. ‘독립예술창작포럼’은 한 작품에 대해 긍정적 피드백으로 시작하고, 이어 부정적 피드백을 주고, 다시 발전적 제안을 들려주는 순이란다. 그는 발전적 대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씹는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것이 욕하는 것이 아니라 “되씹어본다”는 긍정적 의미가 있다고 수정해주었다.

LIG아트홀에서 근무했다는 조성주 독립 프로듀서는 기획자나 행정가의 모습보다는 무용가의 모습이 짙은 인상이었다. “대사 없는 연극에 대한 배려, 이 시점에서부터 다원예술에 대한 개념이 수용되기 시작했다”라는 말이 기억난다.

변방연극제의 임인자 감독은 나긋하게 시작해서 이야기를 가속도를 높였다. 다양한 사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상적인 마인드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현장에서 체득한 현실적인 감각이 돋보였던 발표자였다. 쭉 나열해보면; 다원예술은 멀리는 한반도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의 예술을 어떻게 수용해야하는가도 준비해야 한다, 현행 다원예술 제도에 있어서 성과에 대한 사회·제도적 요청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리슨투더시티·임민욱·박찬경·정연두 등의 작가 거론(난 개인적으로 리슨투더시티와 박찬경, 정연두의 팬이다) 등등이다. 그리고 자유토론을 할 때, 보고서(‘다원예술의 현항과 전만 2012’)의 문제도 지적했다. “지원에서 떨어진 것에 대한 사례와 분석이 있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한국의 정책보고서의 문제는 늘 성공사례와 해외사례만 담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다원예술 지원을 수혜하여 ‘돈의 맛’을 알아 망가진 단체들에 대해 묻고 싶기도 했다.

김소연 평론가는 자신의 직업에 맞게 평론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 이 또한 쭉 나열해보면; 다원예술에서 비평의 용어가 없다, 그래서 정책의 용어를 빌려서 쓴다, 비평의 언어를 축적해야 한다, 비평은 예술현상에 대해 언어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에 따른 담론투쟁과 비평활성화가 되어야 한다 등등이었다.

2부 ‘다원예술 지원제도’. 보다 자유로운 토론이 오고가는 시간이었다. 1부에서 유병진 연구원의 프리젠테이션을 들으면서 궁금했던 점, 즉 다원예술의 범주 정의를 매체실험성(장르실험, 복합장르, 탈장르, 기타)와 가치지향성(사회참여, 공공성, 종다양성, 미학중심)을 나눴는데 이 항목들이 어떤 과정과 기준으로 선정되었는지 질문을 던졌다.

매체실험성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장르만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가 모두 의미 있는 다원예술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기억 하나가 떠오르기도 했다. 예전에 본 공연 중 하나로 무용수가 나와서 악기를 껴안고 ‘이상한 발버둥’을 쳤던 것. 그 때, 그는 그것이 음악과 움직임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했지만(이렇게 보면 그것은 장르실험, 복합장르, 탈장르에 해당된다) 그 공연을 지켜보는 나의 엉덩이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나갈까 말까의 경계 지점, 머리와 입은 욕을 할까 말까의 경계지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앞서 말한 평가항목 중에 하나인 ‘미학’적이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절대 그럴 수 없는 작품이었다. 젊은 예술가들 중에 진지한 고민의 과정 없이 장르만 벗어나면 뭔가 그 역사를 이루고,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을 생산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 또한 다원예술이 잘못 ‘버릇’을 들인 경우일 것이다. 가끔씩 이상한 예술가들이 지원을 받은 공연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의 질문에 대해 책자에 있는 ‘매체실험-가치지향 매트릭스’를 참조하라고 신민경 연구원이 알려줬는데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이해했다는 표정만 지었고, 집으로 오는 내내 들여다보았는데, 내 공부가 짧은 것으로 일단 판단 내렸다.

자유토론에서 임인자 감독의 발언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단 그는 “예술이 있고 제도가 있지, 제도가 있고 예술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내 생각은 좀 달랐다. 다원예술의 경우는 장르로나 비평적으로 명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다원예술’이라는 이름을 예술가나 비평가가 먼저 박아 넣으면서 생긴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예술가들은 생각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대로 생각하다가 제도로서의 다원예술과 마주하여 자신의 예술에 이 장르 명칭을 차용한 셈이다. 그래서 다원예술에서 지원과 정책 제도의 위치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는 미학자 조디 디키의 저서 ‘예술사회’가 떠올랐다. 예술은 예술가가 아닌 ‘제도’가 만드는 것이라지. 이것이 첫 번째 생각.

그리고 두 번째 생각은 임인자 감독의 발언과 상관없이, 예전에 했던 미학 공부를 통해 혼자 머릿속에 그려본 것이다. 생각해보니 다원예술이 이 땅에 뿌리내리는 과정이 17세기와 18세기 유럽에서 미학, 즉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 혹은 ‘감성학(學)’이 당시 절대적인 위치에 있던 ‘이성’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해갔다.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이성’에 비해 ‘미(美)’와 ‘아름다움’은 당시 주관적이고, 따라서 보편적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비이성’의 위치였다. ‘감성’을 놓고 ‘비이성’이라고 말한 헤겔의 표현대로 ‘감성’ 혹은 아름다움은 ‘이성’에 대한 콤플렉스로 뭉쳐 있었다. 그나마 이 지독한 철학자가 ‘감성’에 대해 ‘비이성’ 혹은 ‘근사이성’이라고 말한 것은 ‘이성’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노력하는 ‘감성’의 모습을 애교로 봐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 역사는 진행되고 있다. 보편성을 재점검하게 하는 주관성, 다수의 이성에 반하는 소수의 감성에 대한 존중. 그 역학 관계 속에서 새로운 움직임과 미적 실천이 나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다원예술이 나아갈 방향은 이런 역할이다. 즉 제도로서 정립되기를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사무용’으로 고착화된 ‘무용’을 반성케 하는 것, 혹은 ‘근사미술’로 딱딱하게 범주화된 ‘미술’을, 그리고 ‘근사연극’으로 ‘연극’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다원예술의 지원과 정책은 이 ‘근사’라는 단어와 의미가 사라지지 않도록 힘을 실어주고, 여기서 생산될 수 있는 미학적 지점에 지원 사격을 해주어서 기존의 고착화된 장르에 재밌고 의미 있는 반성의 기제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예술보다 비평과 담론 투쟁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이 ‘근사’를 얼른 떼어버리고 하나의 정격화 된 장르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사’라는 단어가 갖는 전략적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고, 혹은 애매함을 견디지 못하는 예술가들이 이 분야로 몰리고 있는 상황도 무시하지 못한다. 혹은 이 애매함을 악용하는 하는 예술가들, 예를 들어 ‘이상한 음악’ 틀고, ‘괴상한 몸짓’에, ‘수상한 단어’를 내뱉고 음악-무용-연극이 다 합쳐진 ‘다원예술’이라고 하는 예술가들. 혹은 과정적 실험과 작품의 미완을 구분하지 못하는 예술가들. 아무튼 이 분야는 이래저래 공부할 것이 너무 많은 분야다. 다원예술이라는 깃발 아래 좋은 예술가들이 많이 모이기를, 그리고 이런 포럼들이 더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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