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zen] 한 건축가의 쉼 없는 작업의 여정 –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전 (16호)

2013년 4월 23일culturalaction

한 건축가의 쉼 없는 작업의 여정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전

서정일

(서울대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국립현대미술관 건축아카이브 실행위원)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그림일기”라는 부제목을 붙인 정기용건축아카이브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건축전시가 아닌 ‘건축아카이브전시’라니, 정작 전시장을 다녀오고도 이 전시의 진정한 의의를 모를 사람들이 많다. 선생의 다큐멘터리영화를 봤건, 일민미술관의 건축전시회를 봤건, 또는 선생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혹은 함께 서울을 답사했건, 여러 인연 끝에 그를 더 알고 싶었을 방문자들은 그 전시회에 뜻밖의 낯선 정기용을 만났을 것이다. 말하기’만 하지 않고 수없이 그리고 창작한 예술가로서의 정기용, 또 하나의 정기용을 말이다.
여느 건축전시회와 달리, 이 전시는 건축물 사진이나 건축물의 내력을 설명하는 것 하나 없다(없어도 너무 없다). 그 대신 우리 눈앞에서 놓인 실물들은 대개가 알 수 없는 암호처럼 펼쳐 진 그의 작업드로잉들이다. 세부해설도 부족한 드로잉과 스케치북, 원고 등 수천 점의 전시물(그것도 전체 아카이브 자료의 일부일 뿐) 사이에서, 정기용과 그의 건축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중, 사실 헤매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드로잉들은 일차적으로는 건축가가 창작과정에서 자신과 나눈 대화 속에서 산출된 것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정확하게 해독하고 싶어도, 건축가 자신의 이해의 맥락과 개인적 언어를 이해하기 전에는 설령 건축전문가라 해도 해독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 등으로 예상했던 정기용을 확인하러 온 사람들에게 이 전시는 새로운 충격을 던진다. 또한, 이 건축가의 참모습이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겠구나 하는 메시지를 받을 수도 있다.
<계원조형예술대학> 마스터플랜, 1991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사실 이 아카이브전시회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첫 번째 건축아카이브사업을 일반에게 홍보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다. 정기용 선생은 작고하시며 자신의 모든 작업자료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고, 그 결과 국내 최초격의 미술관건축아카이브가 마련되었다. 2년 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은 건축아카이브의 성격을 규정하고 전략을 수립하게 되었고, 선생의 자료에 대해 수집, 분류, 목록화, 보존처리, 디지털화, 기초연구 작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기본작업이 끝난 즈음에 이 전시회가 마련되었고, 올해 9월에 전시가 끝나고 나면 그 뒤에는 이 자료들을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연구자들이 직접 방문해서 자료를 연구할 수 있다.
이 아카이브의 탄생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건축아카이브의 필요성을 절감한 뜻있는 건축학자의 관심과 요청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 요청에 너무도 잘 부합하는 정기용이라는 특출한 건축가의 작업이 운명처럼 만났다. 건축분야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 일반에서도 이러한 아카이브사업은 예술가와 예술작업의 의의와 가치를 역사적으로 밝히는 학술연구에서 필수적인 사업이다. 비록 정기용선생 본인이 생전에 자신의 작업에 대해 충실히 설명하려 노력했지만, 그의 건축작업의 여러 가치들,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환경적 가치들은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앞으로 우리는 미래의 요청에 따라 정기용의 작업을 두고두고 참조하게 될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정기용아카이브는 그 자료의 범위와 수준에서 이후에 마련될 아카이브들에 대해 그야말로 모범적인 건축아카이브에 속한다. 풍부한 창작자료 즉, 각종 드로잉, 모형, 스케치, 도면, 원고, 사진, 영상 등은 물론, 선생이 수행한 각종 연구, 강의, 또한, 민예총, 문화연대 등에서의 활동 등, 그 밖의 각종의 생애자료가, 마치 이런 일을 예견했노라 싶을 정도로 평소 꼼꼼히 수집해 둔 선생의 삶의 태도와 노력 덕에 한 곳에 정리되고 보존될 수 있었다. 선생처럼 이렇게 방대한 자료들을 제시할 수 있는 건축가란 오늘날 결코 흔하지도 않거니와, 짤막히 말하자면, 이렇게 풍부한 자료의 존재이유는 선생의 고유한 작업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즉, 드로잉은 건축가들에게 본연적으로 중요한 창작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서 건축가들은 더 이상 선생만큼 드로잉에 의존하고, 드로잉을 통해 사고하는 데 의존하지 않는다. 선생의 작업은 그 방식이 가진 모든 풍부한 장점들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그 드로잉 한 장 한 장, 원고 한 장 한 장에 깃든 손놀림과 생각의 시간, 그 시간의 총량은 어마어마하다. 아카이브의 내용들을 속속들이 모른다 할지라도, 이 전시는 어느 측면에서는 한 예술가의 정신에서 누에고치의 실처럼 섬세하고도 오랫동안 풀어내어진 길고 이어진 시간, 책상 위에서는 길 위에서건 쉼 없이 풀어내어진, 깊숙한 시간 그 자체의 전시다. 그것과 마주하는 것은 결코 흔하지 않은 감동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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