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경이의 야옹야옹] 공통된 미래를 꿈꾸기 위한 모두의 공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대한문 분향소 (16호)

2013년 4월 23일culturalaction

공통된 미래를 꿈꾸기 위한 모두의 공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대한문 분향소

 

최미경 (문화연대 시민자치문화센터)

 

2012년 4월 5일 쌍용자동차 노동자 24명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대한문 분향소가 2013년 4월 4일 철거되었다. 중구청은 도로가 ‘공공’의 공간이므로 천막을 철거한다고 했다. ‘공공’의 공간이라 함은 ‘모두’의 공간이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모두’의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그 ‘모두’는 누구인가.

 

공간은 물리적 구성물이 아니라 자연,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공간은 비워져있다가 그 공간을 구성하는 자연과 사람의 쓰임새에 따라 변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는다. 행정가나 도시계획자가 일방적으로 계획하고 도시경관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용자인 시민이 필요로 하는 공간을 구성해야 하고,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의미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공간을 사용하는 시민의 삶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중구청의 대한문 분향소 철거는 그 공간을 1년여의 시간동안 사용하고 있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개인이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는 자신의 일상, 자신의 장소가 없어져서 사회적 관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고립감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24명의 죽음은 이러한 장소성, 공간감이 ‘정리해고’와 함께 사라진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24명의 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대한문 분향소는 24명 개인의 죽음을 넘어선, 장소성과 공간감을 자본과 국가에 의해 철거당한 우리 모두의 장소이다.

 

대한문은 서울시민에게 ‘보이는’ 공간이며 접근이 쉽다. 그러므로 대한문은 비움과 채움이 넘나드는 공적공간(public space)이어야 한다. 공간의 모양은 다양하게 변화하고 재구성되었을 때 생명력을 갖는다. 공적공간은 때로는 비워져 있다가 때로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사회적 인정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공간으로 바뀔 수 있어야 한다. 개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은 좋은 공간, 좋은 도시를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공간을 구성할 때는, 더 민주적이고 좋은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또한 ‘자연과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간구성’이 좋은 것이라면, 대한문 분향소를 철거하고 조성한 대한문 화단은 자연을 배려하지도 사람을 배려하지도 못했다. 1년여의 시간을 거주하고 있었던 노동자들의 삶을 철거했고, 그 공간을 채운 화단은 그곳을 지나다니는 시민의 보행권도 고려하지 못했으며, 화단에 있는 꽃들 역시 정치적으로 도구화되었다. 이번 중구청의 대한문 분향소 철거는 삶과 자연에 대한 존중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공간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도시와 공간을 보는 시각의 전환, 자연과 인간, 비움과 채움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이 필요하다. 대한문이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가시적인 공간이라서, 농성천막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더욱 적극적으로 보여져야 한다.

 

1년여의 대한문 분향소에서의 사회적 관계와 경험은 정리해고 때문에 상실된 자아정체감, 장소정체성을 다시 이 사회와 연결해주고 있었을 것이다. 중구청의 행정대집행 때문에 철거된 그 연결의 끈을 다시 사회적으로 묶기 위해서, 쌍용자동차 노동자 24명의 삶과 죽음은 ‘대한문’이라는 가시적인, 접근하기 쉬운, 더욱 잘 ‘보여지는’ 공간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해고와 죽음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자신의 장소를 찾을 때 우리는 공통적인 삶, 공통된 이야기, 공통된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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