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로운 덕후의 우울]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28호)

2013년 10월 17일culturalaction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

최지용
덕후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휴덕은 있지만 탈덕은 없다’고. 덕질을 그만둔 인간들도 언젠가는 다시 이쪽 세계로 돌아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고교시절 애니메이션이라면 죽고 못 살던 친구가 있었다. 서로 취미가 같은데다, 그녀석도 나처럼 자아가 불안정한 탓에 우리는 쌍둥이처럼 서로 붙어 다녔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을 방어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좀처럼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그 녀석을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는 떨어져있던 시간만큼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접점을 찾지 못해, 감자탕과 소주잔을 가운데 두고 뱅뱅 맴돌았다. 결국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대화의 주제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너 요즘 애니메이션 보니?” “아니 요즘 보는 거 없어. 볼만한 게 없더라.” “크크 나도 요즘 그래. 덕질하고 싶은데 덕질할 애니가 없다. 흐흐” “뭐 곧 있으면 덕질할만한 애니가 나오겠지.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으니까, 우린 다시 덕후질을 하게 되어 있어”
시시껄렁하게 서로 피식피식 웃긴 했지만 이내 정적이 다시 우리 둘 사이를 덮쳤다. 그런데 정말일까? 정말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는 걸까.
우리는 애꿎게 요즘 애니메이션이 볼만한 게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사실은 예전 같은 열정이 없어진 탓일 거다. 애니메이션에 열정과 시간을 쏟기에는 다른 할 일(해야만 하는 일)이 많아진 까닭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더 이상 애니메이션으로 도피해야할 만큼 외롭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썅,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마코토가 치아키를 향해 달려가던 장면을 볼 때의 떨림 같은 걸 이젠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건가.
고백하자면 원래 이번호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에 대해 쓰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컴퓨터 키보드에 열 손가락을 올려놓는 순간, 바람이 분다든 미야자키 하야오든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애니메이션 따위 지긋지긋해. 생각도 하기 싫다. 그냥 좀 쉬고 싶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참 웃기는 일이지. 한 때는 애니메이션을 빼놓고는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정체성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는데 말이야.
더 이상 희망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세상이 그따위로 변한 것인지, 내가 변한 것인지, 내 주변의 환경이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애니메이션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의 몹쓸 상태가 되었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는 거야.’ 돌림노래소리처럼 내 머릿속을 맴돈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가까운 날에 나는 다시 애니메이션을 보고, 행복하게 웃는 주인공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웃고, 다시 즐겁게 글을 쓸 수 있게 되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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