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금상의 다문화사회 읽기]신대륙 발견일, 콜럼부스데이(Columbus day)의 두 얼굴(28호)

2013년 10월 17일culturalaction

신대륙 발견일, 

콜럼부스데이(Columbus day)의 두 얼굴

권금상 / 사람숲다문화연구소 대표, 문화연대 집행위원
10월 12일은 미국의 국경일 콜럼부스데이다. 1492년 이날에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지원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다 신대륙을 발견한 날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미대륙 발견 후 3세기 이후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란 나라가 탄생하게 되었으므로 매년 10월 둘째 주 월요일을 국경일 콜럼버스데이로 정하고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벌인다.
미국은 초기 정착한 앵글로 색슨계의 백인 중심 사회에서 점차 비영어권으로부터 온 이민자들이 모여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변모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다국적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세계화에 대한 회의론과 함께 콜럼버스데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콜럼부스의 신대륙발견이 유럽인들에게는 새로운 영토의 확장이었으나 그곳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에게는 살육과 강탈을 경험하게 된 재앙의 시작이었다. 무장권력을 앞세운 유럽자본가들의 폭력에 의해 미대륙의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몸과 영토와 재화를 강제로 빼앗겨야 했기 때문이다.
       
     콜럼부스(Christopher Columbus)와 콜럼부스데이 거리축제(출처 : 구글)
콜럼부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신대륙 최초의 발견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탐험가였지만 새로운 곳을 향한 궁금증과 가장 원했던 정보는 ‘금’의 소재지였다. 당시 다른 탐험가들이 아시아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던 것처럼 인도와 아시아에 금과 향신료라는 재화가있다고 확신하며 스페인 왕과 왕비에게 탐험 지원을 설득하였다. 왕은 그에게 금과 향신료를 가져오는 대가로 이익의 10%와 발견한 신대륙 통치권, 그리고 대양의 제독이라는 명예를 주기로 했다. 당시 스페인은 얼마 전에서야 통일이 돼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처럼 근대국가의 하나가 됐다. 가난한 농부가 대부분인 국민들은 전체 인구의 2%이지만 전국토의 95%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들을 위해 일했다. 스페인은 카톨릭 교회와 연계해 유대인들을 추방했고 무어족도 내쫒았다. 스페인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금을 찾고 있었다. 당시 새로운 부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금은 어느 곳이건 무엇이건 환매와 물품교환이 가능한 국제통용 화폐 구실을 하고 있어 토지보다 훨씬 유용했다.
그 시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와 다른 이들이 아시아에서 가져온 향신료와 실크, 놀라운 물품을 알고 있는 서구국가들은 포획을 위한 아시아 항해에 도박을 걸었다.
콜럼부스는 아시아를 향해 떠났지만 그가 생각한 것보다 지구는 컸다. 아시아는 ‘세계가 작다’고 생각한 그가 계산한 것보다 몇 천 마일이나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다.  1492년 10월 12일, 그가 선원들을 이끌고 아프리카 대서양 해안가인 카나리아 제도를 떠난지 33일 만으로 카타리를 떠나 아시아로 향하는 길의 1/4쯤에서 발견한 것이 아메리카였다. 미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인디언이라 명명한 것도 인도 섬의 사람들 일거라는 착각에 의한다.
육지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로드리고라는 선원으로 하얀 백사장을 발견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처음 발견자는 일생동안 매년 1만 마라베디(옛 스페인금화) 연금을 받기로 되었다. 그러나 그가 연금을 못 받은 이유는 콜럼부스가 전날저녁 보았다고 주장했고 그 연금마저 콜럼부스가 차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콜럼부스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영원하신 신, 우리의 주님은 불가능한 길이라도 따르는 이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것이다”라며 종교적 언사로 점칠 된 거짓 보고서를 올렸다고 알려져 있다.
콜럼부스의 과장된 보고서와 약속으로 인해 두 번째 탐험에는 17척의 배와 1200명 이상의 건장한 남자들이 노예와 금을 차지하러 원정에 올랐다. 이들은 원주민을 잡고, 반항하면 죽이고 부녀자와 어린이도 잡아들였다.
콜롬부스가 보고하기를 ‘그곳 인디언들은 너무 순진하고 물건에 욕심이 없어서 그들을 직접 보지 않는 사람들은 믿지를 못할 것이다. 당신이 그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요구할 때 그들은 절대 노(no!)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군가와 나누기를 원한다’. ‘아울러 다음 항해에서 왕과 왕비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금과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노예들의 가져올 것을 약속한다’ 등이 내용이었다. 그 보고서는 종교적 언사로 가득했는데 “영원한 신, 우리의 주님은 설사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주님의 길을 따르는 이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콜롬부스의 과장된 보고서와 약속 때문에 그의 두 번째 탐험에는 17 척의 배와 1200 명 이상의 남자들이 주어졌고 항해의 주된 목적은 금과 노예감의 포획이었다. 그러나 그 원정대들이 섬에 갔을때 텅빈 마을들을 발견했다. 또한 나비다드에 남겨 놓았던 본국선원들이 인디언들과의 전투에서 몰살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노예로 데려갈 남자들이 안보이자 대신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잡아가면서 원주민들은 거세게 저항하게 되었고 수많은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처참히 목숨을 잃었다.
외부와 문화적 접촉이 없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침입한 백인들을 신이 보낸 성자로 여겨 맞아주었으나 정복자들이 되돌려준 것은 폭력적 강탈과 무참한 살육이다. 당시 유럽인들의 경쟁적인 영토 확장 방식은 공존보다는 무력과 약탈을 택했다.
     
컬럼버스와 신대륙 원주민(출처:구글)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렸던 침략 당사국들 중 다수는 현재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이다. 폭력 기반위에 물적 토대 획득의 호혜를 입었고 날로 번창한 오늘에 이르지만 그들이 행한 폭력적 역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 세계 역사가 그러하듯 전쟁은 승리자에 의해 기록된다.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영토에 침략이라는 범죄적인 인식보다는 다수의 백인 이민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개척을 할 수 있는 희망의 날로 기록되어 왔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강조하는 탐험정신에는 개척이란 명분 아래 수많은 원주민의 대량 학살을 통해 이주민의 국가를 설립한 잔혹사를 기반으로 한다.
현재 자유주의자들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진행 속에서 이민자, 소수민족들의 평등한 시민권을 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는 여전히 인종청소, 종교분쟁, 인종갈등, 소수민족의 불평등함으로 인해 권력구조와 맞서 인권이슈의 다양한 갈등을 겪고 있고 민주사회에서 조차 자본주의 권력에 의해 소수자들의 권리는 빼앗기고 있는 실정이다. 콜럼부스는 자본주의 권력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가 교과를 통해 배우고 인식하는 신대륙역사는 누구에 의해 포장되고 만들어진 지식인가 콜럼부스 기념일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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