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우리 사회에 대한 끊임 없는 은유로서 인문학 현장을 비평하다 ㅡ평론가 오창은(28호)

2013년 10월 17일culturalaction
우리 사회에 대한 끊임 없는 은유로서 
인문학 현장을 비평하다
ㅡ평론가 오창은
정리 : 최혁규/문화연대
개인적으로 필자는 오창은 평론가의 이름을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난장, 2009)를 통해 처음 접했다. 이 책은 지행네트워크라는 대안 연구공간의 주축이 됐던 오창은, 이명원, 하승우가 함께 쓴 책이다. 2009년 당시 그들은 이 책에서 단순한 지식공동체가 아닌 ‘지식협동조합’이 필요하다는 대단히 신선한 주장을 했지만 그들의 시도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실패의 고배를 마실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대략 4년의 세월이 흘렀고 <문화빵> 22호 “지식공동체, 대안을 말하다”에서 다룬 바 있듯 협동조합 형태의 지식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최근 지식사회의 흐름 속에서 이명원 교수는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시민대학’을 통해, 그리고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은 ‘땡땡책협동조합’을 통해 그 시도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오창은 평론가는 새 책 <절망의 인문학>(이매진, 2013)을 냈다. 새 책의 출간을 맞아 오창은 평론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다.
최혁규: 최근 협동조합 형태의 지식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흐름이 있다. 물론 이전부터 지식공동체나 연구공동체는 있었지만 협동조합 형태라는 점에서 분명이 차이가 있다고 본다. 이런 지식협동조합의 모델은 지행네트워크가 주장했던 부분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가 궁금하다. 그리고 지행네트워크가 지식협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잘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
오창은: 공식적으로는 이명원, 하승우와 함께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라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식협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게 벌서 몇 년이 지났고 좌절했었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시도였다고 본다. 지금 협동조합의 붐과 더불어 이런 흐름이 다시 논의되고 있는데, 이명원은 이명원 대로 ‘지식순환협동조합’을 통해, 하승우는 하승우 대로 ‘땡땡책협동조합’을 통해 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과 지식공동체를 논의했었지만 이게 지식인만의 힘으로는 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지식공동체엔 대중들의 요구, 그리고 그것에 응하는 다양한 힘들, 그리고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장 등의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보는데 그 당시엔 그러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단 협동조합에 함께 할 수 있는 활동가가 부재했었고, 대중들의 자발적인 요구도 없었고, 공간 결집력도 없었다. 그땐 공유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실질적으로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자발적인 요구들이 없던 시기었다. 일단 협동조합이라는 게 지금처럼 법적으로 받쳐주지 않던 상황이기 때문에 지식을 가지고 협동조합을 만든다는 게 힘들었다. 지식공동체에서 중요한 점은 물질성이 없는 지식을 어떻게 물질적인 형태로 전환시켜야 하는지이다.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고려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최혁규: 지식공동체를 통한 지식운동은 대안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원하고 있다는 수요자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고, 지식인들의 당사자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식공동체가 책읽기 모임 같은 자발적 모임의 확장일 수도 있고, 대학 안에서의 생존과 학문 재생산의 불가능에 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공동행동이기도 하다. 이렇게 지식생산, 유통, 소비의 면에서 지식협동조합은 대학의 대안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과 지식공동체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 혹은 대학 안과 밖이 어딴 관계를 지향해야 하는가?
오창은: 먼저 지식사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안적 지식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직간접적으로 대학사회와 연관되어 있다. 대학에서 공부를 했거나 대학에서 머물고 있는 지식인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대안적 지식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대학 내에서의 과잉된 부분 혹은 결핍된 부분을 해소하려는 움직임과도 연결되어 있을 거다. 그래서 이런 대학과 대안적 지식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어쨌든 대학이 오작동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사태 속에서 과잉되거나 결핍된 것들이 대학 밖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안팎의 관계에 있어서 재편의 관계이냐 보완의 관계이냐 물어볼 수 있겠지만, 이런 건 지금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어쨌건 대학이 오작동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강력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최혁규: 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지식인들에게 이런 문제점을 유발시킨 이유 중 하나는 학진 체계다. 대학이 오작동하는 덴 이런 부분이 밀접하게 연관 있을 거다. 이것뿐만 아니라 인문학자, 문학평론가, 문화연구자로서 이런 문제점들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오창은: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는 법과 제도에 의한 관리사회에 들어왔다. 인간의 가치를 법과 질서가 대신해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 법을 지키는 게 인간적 삶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법을 잘 지키는 게 커뮤니티의 중요한 핵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 부분이 관리사회에 진입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시민적 기본을 한 다음에야 다른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훈육된 거다. 이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끝내야 다른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게 대단히 합리적인 것 같지만 근본적인 사고를 무화시키는 시스템 작동 방식이다. 마치 시스템 내로 들어오는 형태가 되어야 모든 게 가능한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근대적 합리성을 획득하는데 몰두하다보니 제도나 법질서가 합리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끊임없이 헤게모니 싸움 중이고 이데올로기 투쟁 중이다. 하지만 약간의 착시현상이 발생한다. 법 질서가 제대로 작동하고 이것을 제대로 지키면 마치 좋은 사회가 될 것 같은, 제도적 합리성이 관철되면 사회가 좋아질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착시현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제도적 합리성이 간과하고 있는 행복의 가치나 인간적 가치를 끓임 없이 재숙고 할 수 있어야 한다. 훈육된 삶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
최혁규: <절망의 인문학>을 보면 인문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인문학자의 길을 택했는가? 왜 자신의 근본성을 인문학에 두고 싶어 하는가? 지속적으로 인문학자로서 인문학의 현실을 비판하는 긴 호흡의 글을 써왔는데 분명 그 원동력이 있을 것 같다. 그 애정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오창은: 솔직히 어렸을 때 나를 매혹시켰던 건 역사학이었다. 역사학 중에서도 고대사학이었다. 그런 관심에서 시작해서 철학, 문학 쪽으로 관심이 확장됐다.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과 자신을 좋게 평가해주는 부분은 다른데, 나를 계속 좋게 평가해주는 부분은 문학이었고 글쓰기와 연관된 것들이 많았다. 또한 내가 고등학교 때 세계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의 영역이 있었는데 이를 설명하자면 정치학의 영역, 문사철의 영역, 신학의 영역이었다. 이 중에 내 나름대로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해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인문학적 영역을 선택하게 됐다. 최근의 고민은 내가 근본적으로 사고하고 있는지다. 그리고 제도가 인간의 감각들을 훈련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부분들에 대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절망의 인문학>을 조금 더 이론적으로 끌어갈 수도 있었지만, 현장을 기술함으로 인해서 나의 감각을 객관화시키는 게 굉장히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많이 알고 있어서 연구자들은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문제지만 이 공통감각 속에서 우리 현실을 진단하고 싶었다. 익숙한 문제설정일지라도 내면의 문제로만 가지고 있는 거랑 진술의 형태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문화연구자로서 중요한 시대에 대한 증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라는 바가 있다면, 이 책이 학문 세계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한 은유로 끊임없이 읽어내며 자신의 현실을 해석해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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