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다방]자유롭고자 했던 인간, 자유롭고자 한 만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26호)

2013년 9월 17일culturalaction
자유롭고자 했던 인간, 자유롭고자 한 만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최혁규 / 문화연대
한 만화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청소년유해매체물 판정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도 책을 구하기 위해 서점의 서가가 아닌 데스크에서 책을 주문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만화를 출간한 길찾기 출판사가 이에 불복해 재심의 요청을 했고 지난 8월 29일 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간윤위)는 결과적으로 청소년유해매체물 결정을 취소했다. 이렇게 이 작품은 유해물이라는 판정에서는 벗어났지만 얼룩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어쨌든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자유롭게 날아오르고자 했던 한 인간의 삶을 다뤘지만 한국에 들어오면서 청소년보호법(이하 청보법)에 발목이 잡혀 유해물이라는 멍에를 쓰고 허공에서 날개짓을 하던 시절을 보낸 것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그림 킴, 글 안토니오 알타리바)은 이 만화의 작가인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아버지의 생애를 다룬 만화로, 자살이라는 다소 무거운 사건으로 프롤로그를 열지만 그 과정을 재치있고 익살스럽게 그려내며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끔 한다. 만화는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프랑코 독재정권을 온 몸으로 통과하면서 자유롭고자 노력했지만 좌절하고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일생을 담고 있다. 이렇듯 유럽 현대사와 그 역사 속의 한 개인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스페인 내에서 10개 이상의 상을 수상하고 여러 나라에 번역 출간될 정도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사실 한국에서 청보법은 다양한 표현물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청소년보호 이데올로기는 은밀하게 작동하면서 표현물 자체에 대한 국가적인 규제와 동시에 창작자의 자기 검열 또한 행하고 있다. 청보법은 1997년 김영삼 정부 시절 시행되었는데, 이 법은 시행되자마자 청소년보호라는 그럴싸한 명목으로 각종 표현물들을 검열하는 체제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는 잠깐 뜸해지는 듯 싶다가 이명박 정부에서 청보위가 복권함과 동시에 다시 활발하게 표현물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보건복지부 산하 위원회였던 청보위는 2010년 여성가족부 산하로 이전되면서 더욱 더 모성애를 발휘하여 청소년보호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있다. 청보법의 등장으로 각종 매체들은 청소년유해매체물이라는 이름으로 검열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영화나 게임과 같은 경우는 영상물등급위원회와 게임물등급위원회를 통해 등급분류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사전심의라는 심의형태 때문에 일종의 가이드 서비스로서 기능해야 될 등급제가 오히려 더한 검열의 기능을 하고 있다. 단순히 청보법의 문제가 아니다. 청소년보호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한 청보법으로 인해 등급제나 청유물 판정은 간행물이나 방송프로그램, 영화, 비디오, 공연, 게임, 음반 등을 직 간접적으로 검열하게 될 것이다.
 
특히 간행물에 적용되는 부분을 살펴보면 청보법 제8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제8조는 청소년유해매체물의 심의 결정에 대한 조항으로, 각 매체물을 심의하는 기관이 ‘윤리성’과 ‘건전성’의 여부에 따라 유해성을 판단하게 되어 있다. 간행물을 심의하는 기관은 간윤위인데, 출판문화진흥법에 따르면 간윤위는 ‘간행물의 윤리적ㆍ사회적 책임을 구현하고 간행물의 유해성 여부를 심의하기 위한 위원회’이다. 또한 간윤위는 출판문화진흥법 제19조 ‘간행물의 유해성 심의’를 기준으로 청유물을 판단한다. 요약하자면 체제위협성, 음란성, 폭력성이라는 세 가지 항목이다. 여기서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청소년유해매체물 판정을 받은 항목은 체제위협성이나 폭력성도 아닌 ‘음란성’이다. 그래도 작품이 이념적 갈등과 세계대전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체제위협적이거나 폭력적이라는 지적을 받으면 또 모를까. 몇 개의 장면들을 꼬투리 잡아 음란물이라고 판정을 내린 건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다. 혹자들은 만화의 제목에 있는 ‘아나키스트’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함의성 때문에 간윤위가 음란성을 내세워 청유물 판정을 내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설령 이 추측이 사실일지라도 이 만화를 억압하는 대외적 명분이 청소년보호라는 점이 문제다.
사실 만화의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비행의 예술’(El Arte de Volar)이다. 자유롭게 삶을 날아오르고자 했던 신념을 가진 한 인물의 삶이 어떤 정치적 사회적 상황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이다. 만화의 구성도 5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프롤로그로 시작해서 4층 유년기, 3층 청년기, 2층 중년기, 바닥 노년기로 점차 추락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가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살아남으려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해야만 했다. 단순히 지난날의 이상을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격동하는 사회와 억압적인 체제 하에서 이렇게 타협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만화를 읽으면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묘한 슬픔과 분노감이 교차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길을 가지는 않아야 한다. 청유물 판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지만 앞으로 다가올 다른 작품들도 검열에서 자유롭게 되어 같이 날아오르는 상상을 해보자.
*이 글은 민중언론 <참세상>에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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