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사네 TV보기]칼과꽃-배우의 얼굴을 보다(26호)

2013년 9월 17일culturalaction
칼과꽃 – 배우의 얼굴을 보다
박은정
 한동안 무협드라마를 열심히 본 적이 있다. 무협드라마의 여러 매력들을 알아갔는데 그 중의 하나가 품위가 있다는 것이다. 무림 고수들의 언행은 절제되고 우아하다. 이것을 카메라가 조용히 따라가고 인물을 클로즈업하여 쉽사리 표정을 보이진 않는 인물들의 감정을 잡아간다. 겉은 고요해도 그 속의  감정들은 매우 치열하다. 카리스마 있는 인물들의 예의 바르고 우아한 움직임에 감탄했고, 그들의 치열한 인간의 감정에 자극 받았으며, 그들의 고독함에 연민을 가졌다.
KBS 2TV 20부작 수목드라마 <칼과꽃>이 무협드라마의 이러한 미덕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종영한 지금은 이 드라마가 무협보다는 이명세 감독의 <형사 Duelist>의 미덕에 가깝다 생각된다.
  요즘 드라마는 이야기의 힘으로 극을 탄탄하게 끌고 간다. 그러나 <칼과꽃>은 이미지와 분위기로 극을 이끌어나간다. 민낯의 또는 강렬한 색채의 이미지는 긴 호흡으로 품위 있게 조용히 움직인다. 그래서 이 드라마 과연 대중성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역시나 시청률은 회를 거듭할수록 최저를 기록했다. 나도 보다가 여러 번 졸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점은 흔들리지 않고 자기 페이스 대로 끝까지 같다라는 것이다.
첫 회 시작에서 고구려 공주(김옥빈)는 이렇게 말한다.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고구려, 110만 수나라를 물리친 고구려는 중원의 지배자로 등장한 당의 압박을 받는다. 천천히 준비하여 물리치자는 영류왕(김영철), 당장 맞서 싸워야 한다는 연개소문(최민수) 그리고 내 생애 단 한 번의 사랑 연충(엄태웅), 연개소문의 아들. 우린 애초에 만나지 말아야했을까? 고구려! 고구려는 왜 멸망하였는가……”
  나라의 멸망과 만나지 말아야했을 사랑, 꽃을 보호하기 위한 칼의 선택이 이 드라마의 주제다. <칼과꽃>은 사랑과 복수의 대서사시로 무게감 있는 배우들과 함께 시종 진지하고 비장하다. 고구려는 왜 멸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지만, tv드라마에서 이렇게도 진지하게 배우들의 감정을 긴 호흡으로 끝까지 담아낸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그래서 이 드라마, 배우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특히 배우 최민수의 얼굴을 새롭게 볼 수 있다. 그 중 한 장면을 이야기하겠다.
  연충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연개소문을 찾아간다. 하얀 적삼을 입은 연개소문은 뒤 돌아 구부정하게 앉아 연씨 집안에 서자인 연충의 자리는 없다고 한다. 연충은 조용히 일어나 정적이 감도는 속에서 옷깃을 스치고, 문지방을 넘어 계단을 내려간다. 연충이 떠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연개소문의 뒷모습을 카메라는 서서히 클로즈업한다. 이 쓸쓸한 부자상봉이 더욱 가슴시린건 좀처럼 tv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긴 호흡의 섬세한 연출과 함께 최민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칠게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은 쪽진 머리가 이렇게 남자에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다. 남자의 쳐진 어깨에서 이렇게 인생무상의 쓸쓸함을 볼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고개 숙여 찡그린 얼굴에서, 푸석한 얼굴에서, 쳐진 눈 밑에서, 깊게 패인 팔자 주름의 선에서 그만 연민의 정이 왈칵 솟구쳐 올랐다.  다른 깊이 있는 중년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한 적은 많지만 이렇게 배우가 자아내는 분위기만으로 맘 설레었던 적은 없다. 그것도 50줄에 접어든 한국 배우에게 말이다. 야인으로 기행을 저질렀던 배우가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힘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제 자리에 있을 때 빛이 난다.
  이 드라마에서 이명세의 <형사 Duelist>를 떠올리게 된 건 매 장면 장인 정신으로 공들여 만든 이미지로 극을 이끌어간다는 것과 짙은 색채감의 인위적인 세트 영상미 때문이다. 수직과 수평의 인위적인 세트 아래서 인물들은 앉아 있든 서 있든, 카메라가 가까이서 잡든 멀리서 잡든, 화면 한 쪽에 치우쳐있거나 대치되어있다. 그래서 어디 기댈 것 하나 없는 인물들의 외로움과 그 쓸쓸함에 가슴 시리다. 이명세 감독의 코미디 요소만 제외한다면 비슷한 점이 많다.
  내가 배우라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대사 없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눈빛으로 몸 짓 만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시청률이 어떻게 나오든 이러한 기회를 준 연출자에게 고마워할 것 같다.  난 이러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았고 그래서 아름다운 배우들의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칼과꽃>의 연출자 김용수PD는 아마도 배우를 사랑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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