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사네 TV보기]<구가의서>, 흐르는 마음을, 불어오는 바람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24호)

2013년 8월 16일culturalaction

<구가의서>, 흐르는 마음을, 불어오는 바람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박은정

미련이라는 것은 쓸데없는 건가? 아님 떨어도 되는데 적정선을 지키며 떨어야 하는 건가? 내가 실생활에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해 하루하루 짐승이 되어 싸우고 지쳐 갔을 때 봄은 끝나가고 여름은 시작되고 있었다. 힘들어서 그런가? 고상할 것 없는 인간사,  온갖 이해관계를 육탄전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HBO식의 진한 드라마보다는 순간 바람은 조용히 불어오고, 눈은 수줍게 내려지며, 고개는  살포시 들어 상대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그런 서정적인 드라마가 보고 싶어졌다. 이런 나의 말랑말랑한 기분에 찾아 본 드라마가 얼마 전 mbc에서 종영한 <구가의 서>이다.

아주 멀고도 먼 옛날 환웅이 이 땅에 내려와 곰은 인간이 되어 웅녀가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만든 환웅의 언약서 <구가의 서>는 이 땅을 수호하는 수많은 신령들에게 전설로 내려오게 된다. 인간이 되고 싶은 신령의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주제다. 신령이 인간이 된 예는 오직 전설의 시작이었던 웅녀! 더욱이 인간과의 사랑이 그 조건이라면 그리고 이 이야기의 공간이 극중에서 설명해준 “그곳은 기괴하고 감히 사람의 접근을 허하지 않는 험한 산세, 태고적부터 산을 지키는 영물들만이 때때로 출몰한다는 그곳 달빛정원”이라면 이 드라마가 서정적이고 슬픈지 않을까했다. 그리고 이 기대는 생각보다 꽤 충족됐다.

이 드라마는 두 가지의 사랑이야기가 있다. 달빛정원을 중심으로 신령 월령과 인간 여인 서화의 비극적 사랑과 이들의 자식인 반인반수 강치와 인간 여인 여울이 도형도관을 중심으로 하는 구김 없는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이 시간의 차이를 두고 반복되면서 다르게 풀어가는 이야기가 흥미로워 이들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천 년 동안 숲을 지킨 월령과 갑자기 관기로 몰락한 양반 여인 윤서화의 사랑은 신파다. 누군가 말했다. 신파는 미련을 떠는 것이라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강치의 어머니 서화이다. 그녀는 몸부림 쳤다. 탐욕스러운 조관웅으로 인해 나락의 끝으로 떨어진 서화는 이렇게 말한다.

“내 운명이 뭔데 기생이 되는 것, 신수의 아내가 되는 것, 괴물 아기의 어미가 되는 것, 난 인정 못해 내 운명으로 인정 안 할 거야 !” 현실을 인정 못하니 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미련을 떨 수밖에 없다. 울 수밖에 없고 죽고 싶을 수밖에 없으며 어리석은 결정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서화의 사랑은 <구가의 서> 드라마에서 비극으로 맺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슴 아프고 애절하다.

반면 강치와 여울의 사랑은 미련을 떨지 않는다. 쓸데없는 욕심도 오기도 부리지 않는다. 이들을 연기한 이승기와 수지는 풍요로운 시대 아쉬울 것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란 요즘 세대를 보여준다. 밝고 당당하며 솔직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다. 감정의 과잉 없이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여울은 죽으면서 혼자 남을 강치가 나 없으면 어쩌나 하며 걱정하지 않고, 강치도 죽어가는 여울을 죽지 말라 붙잡지 않는다. 하염없이 눈물은 흘리지만  잘 가 인사하며 다음에 다시 만나자 한다.

이런 쿨함은 강치의 주변 인물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 인물이 청조다. 강치의 첫사랑인 청조는 조관웅으로 인해 서화와 같은 몰락을 겪었으면서도 다른 길을 간다. 청조는 조관웅에게 몸을 뺏기고 관기가 되지만 현실을 인정한다. 자신을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지 고민하며 길을 찾아 간다. 그리고 그 길에서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이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뭐든 씹어 발기 듯 거침없이 할 말 다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조관웅, 그래서 그를 대하는 모든 이들은 분노에 치를 떠는데 청조는 담대하게 그를 대한다.  또한 그를 불쌍히 여겨 아량을 베풀기까지 한다. 청조는 큰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강치의 사랑이 신파가 아니라서 서정적이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미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했다고 해야 하나? 인간이 되고 싶어 울고 있는 강치를 보며 이순신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담을 수 있다는 듯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대자대비한 목소리로 “흐르는 마음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불어오는 바람을 또한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순간 바람은 불어오고 나뭇잎들은 흔들리며 가슴 아련하게 스며드는 이 촉촉한 먹먹함에 난  tv앞에 한동안 있었다.

여담 – 그렇다면 나의 현실에서의 서정성은 어떨까?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초 여름 밤, 꽃과 수풀로 뒤덮인 작은 계곡에서 숲의 정령처럼 반딧불이 사방에서 날아다녔다. 귀신 나올까 무서워하며 소심하게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던 친구는 서글퍼한다. 어디서도 본적 없고, 그래서 앞으로도 보기 힘들지도 모르는 이 환상적이며 서정적인 경험을 왜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아닌 10년 지기 동거인 언니와 함께해야하는 것이냐며 옆에서는 60대 노부부가 함께 반딧불을 보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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