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를 이해하기 위하여]실패의 계절(23호)

2013년 7월 29일culturalaction
실패의 계절
임효진
체감 온도 섭씨 마흔, 나는 여름을 실패의 계절이라 부르고 싶다.
어제 저녁, 한 솥 가득 끓여놓은 김치찌개가 쉬어버린 것을 안 어머니가 차분한걸 넘어 진이 다 빠진 목소리로 욕을 했을 때 깨달았다. 여름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매미소리만 믿고 우산을 챙기지 않았는데 강남 한복판에서 적도의 스콜같은 비를 만나 홀딱 젖었다. 의기양양하게 모두가 우산을 피는 순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여름은 정말 짜증난다.
컴퓨터 학원에 다니는 나는 요즘 매일 강남으로 출근도장을 찍는다.
째지게 더운 강남의 오후는 요일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사람으로 그득하다. 화사한 젊은이들이 익숙하게 거리를 누빈다. 매번 강남역에서 보내는 방학이 지겹다면 알래스카로 개썰매 타러 떠나보라는 모 항공사의 광고가 이들을 타겟팅한 것이라면 일단 나는 ‘이들’에서 빠져야겠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2차로 노래방도 못 간다. 노래방에 가면 볼 수 있다. 세계 각지의 휴양지에서 나른한 표정을 한 백인남녀를.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금발미녀를 보며 나도 야자수 아래 누워있는 상상을 했다. 비쥐엠은 클론의 도시탈출.
누구에게나 여름 휴가는 중요하다. 아직 제대로 된 인컴이 없는 나조차도 여름이면 바캉스를 꿈꾼다. 바캉스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크리스마스와 비슷하다. 티비와 책으로 학습한 이국의 이미지들은 나를 들뜨게 했다.
떠나요 푸른 바다로 복잡한 이 도시를 탈출해봐요
모두 잊어요 지난 일들은 붉은 태양아래 벗어 던지고
찌든 일상에서 벗어나 모두 젊은 태양아래 춤을 춥시다
‘도시탈출’이라는 혁명적인 제목치곤 참 정직한 가사구나. 나의 도시탈출은 언제나 서투르고 미숙했다. 망하려고 작정하고 떠난 사람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이었던 몇 해 전 바캉스가 생각난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바다 근처에도 못가보고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아쉬웠다. 그 쯤 나는 종로로 토익학원을 다녔다. 토익이 아니라 술을 마시기 위해 모인 것 처럼 학원 스터디가 끝나면 다들 술을 먹으러 갔다. 친해지긴 어려웠다. 테이블 끝자리에 앉아 홀짝거리다 가장 먼저 취해서 가장 먼저 집에 갔다. 어영부영 8월이 지나고 토익시험은 근처에도 못가보고 학원을 그만뒀다. 여름방학은 원래 그런 법이다. 우리는 종종 (허황된)‘기대’를 (계획된)‘의도’라 착각하고 돈을 쓴다. 그 여름 토익학원비가 그랬고 급하게 잡아탄 부산행 기차표가 그랬다. 하루정도만 있다가 올 생각으로 밤기차를 탔다. 기차에서 잘 요량이었는데 긴장인지 설렘인지 뜬눈으로 새벽 4시, 부산역에 닿았다. 해운대에서 일출을 보려고 첫차가 다닐 때까지 역 안에서 쪽잠을 자기로 했다. 그 불운한 여정을 처음부터 전부 나열하는 건 의미가 없을 테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음놓고 자버린 탓에 일출을 놓친 것을 시작으로 버스를 잘못타서 길을 잃었고 배탈이 났으며, 찜질방에서는 변태를 만났다. 노을이 지는 해변, 사방이 그림인 곳에서도 나는 핸드폰만 노려봤다.
여행이 끝날 쯤에는 속이 다 시원했다. 흔한 여행자의 아쉬움 같은 것이 있을리 만무했다.
 서울행 기차표를 끊어놓고 부산역 2층 출입구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사실 찍을 때만 해도 큰 의미는 없었다.
재촉하는 사람도 없는데 광장의 시계탑과 눈싸움을 하다 괜시리 민망해졌다. 그래서 평범한 관광객처럼 셔터를 눌렀다.
나중에 서울에서 꺼내본 그 사진은 여름인지 겨울인지 계절감도 느낄 수 없이 팍팍하게 말라있었다. 좌측 하단에 간신히 나온 시계탑의 시침과 분침이 어렴풋이 열차 탑승 직전의 긴장감을 떠오르게 했다.
나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중에 이 사진을 가장 좋아한다.
실패의 고전이 되어버린 그 때의 여행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흑백으로 박제된 6시 50분이 생각난다.
 여름은 실패의 계절, 상한음식과 배탈을 주의해가며 고생은 필수 추억은 옵션인 바캉스를 떠나자.  어쩌피 망할거라면 떠나자.
JPG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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