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과 종이]숏과 이별한 영화가 향하는 길(23호)

2013년 7월 29일culturalaction
숏과 이별한 영화가 향하는 길
강신유
일본의 저명한 학자이자 영화평론가인 하스미시게히코가 그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시네아스트인 구로사와기요시 그리고 아오야마신지와 모여 영화에 관한 대화를 나눈 것을 책으로 엮은 <영화장화(映畵長話)>에는 ‘숏의 문제(ショットの問題)’라는 작은 주제하에 하스미시게히코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제는 숏을 찍어낼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하는 시대로 와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두 제자는 이에 동의하면서 다소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인다. 왜냐하면 구로사와기요시와 아오야마신지는 그들 스스로 말하듯 ‘숏’을 찍는 것에 몰두하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화는 공들여 찍힌 숏들의 연결 그 자체이다. (이들이 대화중에 사용하는 숏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있지 않다. 다만 문맥상 테오앙겔로플로스 혹은 오즈야스지로가 그들의 영화에서 구사하는 종류의 숏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두 감독은 촬영한 각각의 숏들을 편집과정에서 쪼개는 것을 본능적으로 꺼려하며 촬영 당시에도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이 둘만의 고집은 아니었다. 과거에 사람들의 작가주의영화 혹은 예술영화에 대한 인상에서 롱테이크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지역을 불문하고 숏을 찍어낸다는 것은 영화에 있어서 마치 코스요리의 메인디쉬와 같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하스미시게히코의 저 말처럼 점점 영화는 숏과 멀어지고 있다.
이 세명의 영화인을 비롯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런 변화에 대해 다소간에 반감 혹은 유감을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길게 찍힌 숏들이 영화에 있어서 정말 큰 의미를 갖고 있었고 또 많은 작가들이 그것에 자신들의 역량과 감정을 담아 멋진 한방을 만들어내기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믿고있는 영화의 시작이 뤼미에르의 <시오타역에 도착하는 열차>인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저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화면을 통해 가만히 지켜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종의 각인이 새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최초의 각인은 이후 수많은 작가들에게 의식이나 무의식을 통해 전해져온 것이다. 그 일종의 유전자는 사람들에게 이런 암시를 걸고 있었는지 모른다.
‘화면을 통해 보이는 현실을 그저 숨죽이고 가만히 응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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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형제의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
그런 의미에서 얼마전에 개봉한 <위대한 개츠비>와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과 같은 영화는 숏과 거리가 먼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부분을 의식하게끔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영화들이 뤼미에르의 각인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이 숏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화면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 아닌 환상임을 스스로 강조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관객에게 마치 하나의 거대한 게임 속 세상을 여행하는 것같은 인상을 준다. 현실에 존재했던 뉴욕과 닮았지만 많은 부분 변형된 가상세계다. 그림책이 원작인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도 이와 비슷하다. 이들 영화 화면이 보여주는 것은 20세기 초의 인물 개츠비와
이란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스콧피츠제럴드의 소설과 그림소설 <Chicken and Plums>의 이야기 그 자체다. 이처럼 영화가 사실 위가 아닌 이야기 위에 세워졌다면 그 화면이 어느 한 장면을 길게 보여주고 관객이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진다. 그 결과 숏이 없이도 이 영화들은 온전히 성립했다. 때문에 이 두영화는 앞으로 영화를 가지고 스토리텔링하기의 새로운 모범이 될 수도 있으며 앞으로 이와 같은 영화 흐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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