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다방]자본과 언어』에 드러난 삶정치의 가능성 ― 크리스티안 마라찌의 『자본과 언어』(23호)

2013년 7월 29일culturalaction
『자본과 언어』에 드러난 삶정치의 가능성
 
― 크리스티안 마라찌의 『자본과 언어』(서창현 옮김, 갈무리, 2013)
박진우(『9.11의 희생양』 역자)
이 책의 제목은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내 생각에 『자본과 언어』는 자본, 언어, 자본의 무의식, 나아가 자본이라는 권력을 가진 인간들의 무의식에 대한 충분한 성찰을 담고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이 같은 기대는 인간의 무의식이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 의해 유지되어온 명제로 인해 더 증폭되었다. 자본과 연관된 말을 분석하는 것이 바로 자본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유지된 생각이었다. 또한 나는 이 책을 통해 자본의 운동/이동 방향, 정치성 등을 분석할 때, 우리가 이 자본을 둘러싼 담론에 집중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티안 마라찌(Christian Marazzi; 1951-)는 전통적 맑스주의자들과의 획기적 단절을 진행한 포스트맑스주의자,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자율주의 이론가다. 그의 『자본과 언어』는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본과 언어의 관계를 명확화해준 연구서다. 맑스주의자가 언어에 집중하는 경우를, 아직 많이 접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마라찌의 이 책은 언어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맑스주의가 죽지 않고 계속해서 진화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자율주의 경제학자인 마라찌의 이 책이 자본과 언어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자본의 무의식을 드러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한 기대는 충족되었다. 자본의 무의식, 다시 말해, 표면적 자본에 잠재해 있는 무시무시한 무의식을 잘 드러내줬다는 점에서 이 책을 다른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는, 그 파국의 도래를 연기시키기 위해, 조금씩 다른 전술을 사용하는 자본의 무의식은 전쟁경제라는 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치경제적 상황을 분석할 때, 언어적 상황에 집중하는 마라찌의 모습은 매우 흥미로웠다. 예컨대, 공황이라는 정치 혹은 경제적 현상을 분석할 때 마라찌는 언어적 차원에 집중한다. 제3장 잉여가치의 귀환에 등장 하는 “단어들 위에서의 놀이” 같은 표현은 그의 분석에 내재한 언어적 차원을 드러내는 실례다. 분명 이 단어들, 발화의 복합적 집합, 혹은 담론 속에서 마라찌가 명명한 신경제의 현 세계, 나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전쟁경제가 움직이고 있다.
자본이 절대적 영향력을 갖추게 되는 금융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언어는 그 체제를 움직일 뿐 아니라 그 체제의 생산 및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다. 예컨대, 투자가들을 증시에서 탈출하게 만든 요인은 미국 연방 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버냉키가 우리 세계에 내놓은 말이었다. 언어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급속한 금융화를 특징으로 하는 신경제 속에서, 전 세계는 더 긴밀히 연결된 상태인데, 이 연결 상태 속 정치경제적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인 것이다. 이 때 대중매체, 매스컴은 이 세계적 연결을 공고히 하고, 그 영향력 있는 담론을 전달한다. 이 매스컴의 영향력은 전 지구적이라 할 수 있다. 매스컴이 전달하는 담론은 이 세계 속에서 관습을 형성시킨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다. 국적을 넘어선, 다중의 신체에 각인된 관습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 관습이 효력을 갖는 공동체를, 마이클 하트의 표현대로 “발화 공동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공동체, 이 말은 포스트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탈근대적 문화사조와 자율주의자들이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무조건적인 경계 해체라는 과격한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 탈근대적 문화사조와 달리, 『자본과 언어』는 뭔가 집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계, 혹은 범주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현실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저 아무런 집단에도 귀속되지 않고, 홀로 쓸쓸히 표류하듯 살아가는 포스트모던 시민일 것 같던 이들이 역설적으로 집단에 귀속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는 현상, 이 때 언어는 가장 큰 역할을 한 요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투자 같은 경제적 문제도, 언어로 구성된 주요 인사의 담론, 이것을 전달하는 매스컴이 만들어놓은 관습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만 생각할 경우, 세계 정치경제의 주요 인사나 그들의 말을 전달하는 언어, 그리고 그 언어에 내재된 권력은 다중이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본과 언어』의 정의로움은 이 책이 다중의 삶정치를 향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신경제를 넘어, 전쟁경제의 도래는 다중의 삶에 커다란 비극이 잠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시간 동안,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국의 국가들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전쟁이었다. 2013년, 그러니까 마라찌의 이 책이 세상에 등장한 2008년을 기점으로 5년이 흐른 지금에도 유효한 극복 전략이다.
이 전쟁경제 속에서 제국의 국가들은 불안한 정치경제체제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 불안한 정세 속에서 다중의 삶 또한 극단적으로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제도권 권력의 정치가 다중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제도권 권력의 삶정치는 문제적이다. 전쟁경제 속에서 무리하게도 정치군사적 규제를 통해 확장하고자 하는 제국, 필시 그들의 삶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삶정치를 전 지구적 통치 권력의 “특권”으로만 이해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이때, 마라찌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아래로부터의 삶정치”다.
물론 이 아래로부터의 삶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 또한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운동으로서 삶정치의 윤곽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분명한 대안이 이 책에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동하는 것 같은 말도 없고, 마라찌는 사람들을 선동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저자는 우리에게 현 시대를 고찰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마라찌가 던져준 이 성찰의 기회는 그가 『자본과 언어』에서 우리에게 제시한 대안이다. 아래로부터의 삶정치에 대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또 성찰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독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어렵다. 『자본과 언어』가 분석한 신경제, 나아가 전쟁경제의 세계가 그만큼 총체성이나 법칙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절되어 있고, 파편화한 공간이 바로 이 전쟁경제의 세계다. 그렇다고 해서 이해가 아예 불가능한 곳도 아니지만, 현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내가 보건대, 마라찌가 제안한 대안, 아래로부터의 삶정치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중이 제국의 질서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것 또한 언어가 아닐까, 적어도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어를 통한 생산과 유통이 제국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라면, 이에 대항할 다중도 이 언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 맑스주의 진영에서 언어, 발화, 담화에 주목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물론 맑스의 저작에서 그 직접성과 가능성을 읽어내는 사례를 몇 차례 본 적은 있지만). 자율주의 이론가 마라찌의 『자본과 언어』를 우리가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자본, 그리고 언어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하다. 게다가, 『자본과 언어』이 다중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삶정치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이 책의 가치를 드높이는 요인이다.
“삶정치는 자본주의적인 전지구적 통치[정부]의 특권이 아니다. . . 다중이 스스로 살아가도록 할 수 있는 정치, 다중의 신체를 보살피는 정치, 즉 아래로부터의 삶정치를 발전시키는 것은, 그러므로 저항 운동들의 몫이다.” (4장 전쟁과 경기순환)
이 책을 읽고 이 끔찍한 세계에 대항할 저항 운동이 우리 몫이라는 점에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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