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로 사유하기] 프로야구, 빈곤한 시구 문화(23호)

2013년 7월 29일culturalaction
프로야구, 빈곤한 시구 문화
정재영 (문화연대)
최근 유행하는, 어느 공중파 개그 프로그램의 코너인 ‘뿜엔터테인먼트’의 한 장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개그맨이 나이 든 여성연예인을 연기한다. 이름이 ‘사기자’인 이 캐릭터는 허영심만 있고 눈치가 없다. 연예인병과 공주병이 혼합된 합병증이다. 자신이 언제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그녀는(그는?) 연예기획사 사장에게 시구를 하게 해달라고 조른다. 사장은 조소한다. “젊고 섹시한 연예인이 시구를 하는 거야. 그 나이에 시구하면 다쳐”
그렇다. 나이 든 여성연예인의 허세를 풍자하려는 코너의 의도는 차치하고, 사장의 발언처럼 프로야구 시구의 주체는 대부분 젊고 섹시한 여성연예인이다. 그들은 몸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매력적인 자세로 공을 던진다. 언론은 이를 한 폭의 사진으로 담아 기사에 싣고, 포털사이트는 그들의 사진으로 도배된다. 대중에게 노출되기 쉬운 시구의 특성상, 평소 유명하지 않았던 여성연예인도 시구로 인해 뜨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시구에 여성연예인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최근 개봉된 영화의 주인공이나 입지도가 상승한 연예인, 그리고 지역의 유명인사도 공을 던진다. 정리하자면, 시구는 연예인의 등용문이자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활용된다.
물론 스포츠가 홍보의 도구로 이용되는 현상을 냉소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스포츠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하는 프로스포츠의 특성상 연예인을 데려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또한 관객의 눈길을 끌기 위해선 무엇보다 인지도를 가진 사람이 마운드에 서는 게 효과적이다. 시구의 역사만 봐도 그렇다. 미국프로야구에서 대통령이 시구를 하는 것은 의례적인 일이고, 한국 프로야구의 첫 시구도 대통령이었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아쉬움을 감출 수는 없다. 야구가 홍보의 도구로만 치환되고, ‘누가 시구에 나서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없다. 프로야구 시구가 관객의 즐거움을 위해 마련된 이벤트라고 하더라도, 여성의 몸을 훑으며 남성들의 성적 만족감을 채우는 용도로 활용되는 것만이 즐거움인지도 의문이다. 또한 반드시 유명인사만이 마운드를 채워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관객들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이들이 야구를 좋아해서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빈곤의 사전적 정의가 ‘내용 따위가 충실하지 못하거나 모자라서 텅 빔’을 포함한다면, 대개 한두 가지의 목적으로 시행되는 프로야구의 시구는 ‘의미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혹자는 시구에 대해 중대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사에 무거울 필요는 없지만, 매사에 가벼울 필요도 없다. 시구란 하나의 의식으로서, 경기가 시작되기 전 스포츠의 가치를 되새기는 시간이라고 본다. 스포츠는 이기기 위해서 하지만, 여기엔 절대적인 조건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선수가 없다는 것이다. 포수가 없으면 경기가 성립될 수 없으며, 외야수가 없다면 상대편의 장타에 맥을 추지 못하고 무너진다. 승리는 이러한 개인들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이룸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스포츠의 가치란, 어떤 위치든 각자의 역할은 소중한 것이며, 공동의 목표란 구성원들의 화합과 소통이 전제되어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포츠의 인문학적 가치를 시구에 부여해보면 어떨까. 나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많아지는 야구장을 꿈꿔본다. 야구로 꿈을 키우는 장애우가 공을 던지는 모습, 한국에서 야구동호회를 운영하는 이주노동자, 운동장을 청소하는 청소부아저씨·아주머니, 선수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는 영양사 등, 우리의 일상 가까이 존재하는 사람들이 공을 던지는 장면을 말이다. 이들은 스포츠 경기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역할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그 속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경기 시작 전, 장내 아나운서가 이들을 소개할 때 관객들은 무엇을 느끼게 될까? 할까? 분명 오락으로서의 스포츠만이 아닌,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인문학적 스포츠’를 경험할 것이다.
스포츠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포츠가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 불쾌해야 한다. 생각해보자. 당신이 사랑하는 A가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 수단이 되는 경우를 목격했다고. 당신이 A에게 부여하는 의미만큼, 스포츠도 응당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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