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경이의 야옹야옹] 삶의 시간 _ 완주 비비정에서 매실을 따다(22호)

2013년 7월 19일culturalaction
<‘문화귀촌’으로의 여정①> 
 
삶의 시간 _ 완주 비비정에서 매실을 따다
시민자치문화센터 활동가 최미경
비가 계속 내린다. 눅눅하고 습한 기운이 서울을 감싸고 있다. 집에 들어가면 천장에 눅눅한 구름이 떠다니는 것 같다. 옷 행거 뒤 벽지에는 곰팡이가 슬고 있고, 빨래대 위의 빨래는 널어놓은 지 이틀이 지났는데도 마르지 않는다. 섬유탈취제를 뿌리고 옷을 입어도 왠지 출근길 지하철을 타면 내 옷에서 물 비린내가 나는 것 같다. 햇빛 냄새 나는 이불을 덮고 뽀송뽀송한 기분으로 잠을 자 본 지 몇 년이 지났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는 햇빛 잘 드는 방을 가지는 것은 돈을 많이 소유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햇빛에 대한 욕망 때문인가? 아마도 이 욕망 때문에 난 ‘문화귀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문화귀촌’은 ‘지역’으로 물리적 공간을 이동함으로써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 혹은 ‘도시’에서 살면서도 – 도시에서 생태적인 삶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점이 있긴 하지만 – 생태적이고 문화적인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 것 등 다양한 상상이 가능한 개념이다. 하지만 나에게 여전히 ‘문화귀촌’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그래서 직접 가보기로 했다. 어디든지. 그 첫 출발점이 ‘전라북도 완주 비비정 마을’이다. 왜 ‘비비정’을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딱히 뚜렷한 이유는 없다. 다만 2012년에 ‘생태적 문화귀촌 우물터 아카데미’에서 알게 된 지인들이 비비정에 놀러간다고 했고, 거기에는 문화귀촌자 _ 스스로 자신을 문화귀촌자라고 호명하고 계시는지는 물어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_ 한 분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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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정마을은 ‘비비정(飛飛亭)’이라는 정자의 이름에서 유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전주에서 내려, 다시 차를 타고 완주로 갔는데, 가서보니 비비정 마을에는 삼례역이 있었다. 서울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삼례역에서 내리면 완주 비비정 마을에 바로 도착할 수 있다. 도시에서 지역으로 내려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민거리 중 하나가 바로 교통문제 ‘자가용’이다. 생태적으로 살기 위해 될 수 있으면 자가용을 사거나 이용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지역은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이동할 때 자가용이 없으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완주 비비정 마을 옆 삼례역에는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가 있고, 삼례읍과 전주가 가깝다는 점이 편리해 보였다.
비비정은 만경강이 흐르는 작은 마을이다. 하루 산책을 하면 동네할머니들을 다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 평균연령 75세 할머니들 30여 가구가 사는 동네였다. 거기에서 2012년부터 살고 있는 김쉐프(요리를 잘하셔서 쉐프라 부른다)를 만났다. 2012년에 귀촌한 김쉐프는 홍대 앞에서 카페를 운영하다 완주로 내려갔다. 마침 빈 공간이 있어서 거기에서 살고 있고, 조만간 새로 집을 직접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장난스럽게 역시 “집 하나쯤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귀촌할 수 있어!” 하면서 함께 웃었다. 김쉐프는 실제 비비정 마을에 있는 농가레스토랑을 짓는데 함께 했다.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지역주민들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고, 마을에서 필요한 일을 함께 하는 게 중요한데, 김쉐프는 비비정 할머니들의 인기와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귀촌을 하는 데 있어, 염려하는 것 중 하나가 ‘지역텃세’인데, 김쉐프는 비비정에 사는 할머니들과 친했다. 어떻게 할머니들과 그렇게 자연스럽게 친해졌는지가 궁금했는데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김쉐프가 준 몸빼 옷을 입고 우리는 농가레스토랑 뒤쪽의 매실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약 1시간 가량 매실나무를 흔들어 매실을 모아 농가레스토랑에 가져다 주었다. 그랬더니 몇 시간 뒤 레스토랑 할머니들한테서 밥 먹으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매실 따다 주어서 고맙다며 하루 레스토랑 일을 끝낸 할머니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매실 따는 일 이외에도 김쉐프는 마을의 갈등을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조정하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김쉐프는 별자리를 볼 줄 알았는데, 할머니들의 별자리를 리딩하며, 할머니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마을에 있는 소소한 갈등들을 듣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도 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가능했던 건, 관계의 기술 중 하나인,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열린 마음과 사랑”, 그리고 마을에서 필요한 일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 그것이 마을의 한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던 이유였다.
누군가와 대화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과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자본주의에서 관계마저 화폐가치로 왜곡되는 구조 속에서 살다보니 어느 순간, 관계는 피곤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해버리고 협력하지 않고 그냥 혼자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었는데, 비비정 마을에서 할머니들과 협력하여 일하고, 대화를 하고 있는 김쉐프를 보니, 관계는 피곤하니 될 수 있으면 사적관계는 맺지 않고 살아왔던 내 자신이 의아해졌다. 그렇지만 솔직히 아직도 자신은 없다. “열릴 수 있을까, 또는 꼭 열어야 하는 걸까”, 아직도 내 자신에게 항상 하는 질문 중 하나이다. 어쩌면 혼자 살아도,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을 사서 해결할 수 있는 소비적 삶에 익숙해져, 협력하면서, 관계를 맺으면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과 일상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런데 비비정 여행 도중, 인간은 함께 살아야 행복한 것이구나를 어렴풋이 느낀 것 같다. 아마도 함께 해야 행복하다고 느낀 건, 성과사회에서 자꾸 “내가 어떻게 보일까”,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이런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삶에서, 여행 중 “나의 능력이 어떻게 평가될까”를 신경쓰지 않고 대화를 해서, 그리고 함께 매실을 따서였던 것 같다. 생산목표를 두고 도구화된 노동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아무 목적없이 매실을 함께 땄기 때문에. 그리고 함께 매실을 따고, 함께 비비정 마을을 산책했던 그 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는 관계가 아니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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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귀촌이 삶의 구조, 방식을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왜 바꾸어야 하는가 등 생각할 거리들이 생긴다. 일단 임금으로 환산되는 구조에서는 일하는 과정이 즐겁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의 가치가 이윤을 내는가 내지 못하는가로 결정되기 때문에 노동을 즐기거나 존중하지 못하고, 노동과정에서 ‘나’는 이윤에 밀려 바깥으로 밀려나고 소외된다. 나의 노동이, 혹은 활동, 작업이 이윤으로 평가되지 않고, 자아가 실현되는 과정이 되는 것, 내가 꿈꾸는 삶의 방식 중 하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에 종속되지 않는, 자립적 삶의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자립적인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혼자 일하고, 임금을 받아 필요한 것을 사서 소비하는 사회에서 잃어버린, 협력, 관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협력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전북 완주 비비정 마을에서 느꼈던, 그 ‘열린 마음’이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완주 비비정에 다녀온지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까, 마치 꿈을 꾸었던 것처럼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낭만적으로 떠오른다. 매실을 따고 있을 때, 같이 갔던 한 지인이 “표정이 행복해 보여요”라고 내게 말했는데, 문득,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들어본 게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마도 내가 나도 모르게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건, 아무목적도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생산량만을 목표로 하거나 이윤으로 환산되지 않는, ‘나’가 소외되지 않는 건강한 노동, 성과로 서로를 평가하거나 경쟁하지 않는, 열린 관계와 마음”이 문화귀촌으로 가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아무 목적없이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경험을 해본지 너무 오래되었다. 함께 매실을 따고, 산책하며 자연이 선물해준 앵두와 오디를 따먹었던, 그 시간들이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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