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무대연구소 일지]음악회장의 풍경을 담은 소설, 이효석의 <벽공무한>(21호)

2013년 7월 3일culturalaction
음악회장의 풍경을 담은 소설, 이효석의 <벽공무한>
송현민(음악평론가, 음악문화연구자)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소설가 이효석. <벽공무한>은 1940년 1월부터 7월까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된 그의 또 다른 소설이다. 연재될 때의 제목은 원래 <창공>이었다. 1941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하면서 제목이 <벽공무한>으로 바뀌었다 ‘창공’이나 ‘벽공’은 모두 ‘푸른 하늘’을 뜻한다.
많은 이들이 이효석을 <메밀꽃 필 무렵>으로 대변되는 토속적 탐미성을 추구했던 작가로 알고 있다. 아니,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벽공무한>을 펼치면, 그가 그려내는 서구적인 분위기에 새롭게 도취된다. 러시아 댄서 나아자의 사랑과 결혼을 중심으로 교향악단·영화·금광·복권·경마·마약 등 만주국 치하의 하얼빈과 경성의 다양한 풍속도를 그린 일종의 애정소설이기 때문이다.
눈길을 끈 것은 <벽공무한>에 등장하는 하얼빈교향악단이었다. 젊은 실업가 유만해에게 첫사랑 남미려를 빼앗긴 천일마가 현대일보사의 의뢰를 받아 중국 하얼빈으로 교향악단을 초청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에 편린으로 있는 하얼빈의 음악회장의 모습도 궁금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외국에 있는 음악회장인 셈이다. 그런데 요 며칠 음악평론가 박용구(1914~)의 책들을 뒤적이고 있던 중 그 진면모와 당시 풍속을 엿볼 수 있는 글과 만났다. 제목은 <음악회장>(1944). 글의 일부분을 옮겨본다.
음악회 형식의 발상지인 서양을 못 가보았으니 큰소리는 못할 형편이지만 하르빈의 대표적 음악회장인 철로구락부는 아직도 인상깊다. 북구식의 두터운 이중문을 밀고 들어서면 우선 모자와 외투를 맡겨야 한다. 입장권을 도로 준 다음에 프로그램을 한 장 사들고 들어서는 곳은 음악회장의 나다분한 의자가 아니고 넓고 큰 살롱이다. 
여기의 연주회장은 회장만큼이나 큰 살롱을 좌우익에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왼편 살롱에는 레삥의 유명한 <대장 부리바 연락도>의 정묘한 모사를 위시하여 대소의 북구적 풍경화가 걸려있고, 여기서 식당이 연해있다. 식당에는 테라스가 있어서 백양목이 들어선 야외음악당을 바라보게 되어 경관이 좋다. 
이 곳에서는 자리다툼하는 촌극을 못 보았다. 문을 들어서자 곧 회장의 의자로 독격하는 것부터가 이방인이다. 사람들은 무거운 외투나 모자를 벗어서 가뿐한 듯이 우선 한 대 피워묵고 동무들과 잡담이 벌어진다. 그들의 표정은 식후 한 대나 하려고 살롱에 나려선 공작들과 그 부인 같다고도 할 유양한 대토요 태탕(胎蕩)한 표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음악회도 어느덧 시작된다. 부민관이나 히비야공회당처럼 동물원 원숭이 몰아넣듯 하는 전종(電鐘)소리는 없다. 
지휘자도 어느덧 나타나고 지휘봉도 어느덧 그어진다. 속삭임도 연방 일어난다. 그들은 군중 속에서도 자기의 호오(好惡)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휴게시간은 20분인지 30분인지 좌우간 길다. 우리가 보이게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이때다. 노청남녀(老靑男女)가 쌍을 지워 팔들을 끼고 살롱의 주위를 돌기 시작한다. 그 행렬은 점점 길어간다. 마침내는 쳇바퀴처럼 이열종대의 둥그런 원이 된다. 그들은 제각기 무엇이라 지껄이며 속삭이며 간단없이 돈다. 소파에서 이 행렬을 무심히 바라보며 명상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살롱에는 사람이 넘치면서도 이런 투로 여기에는 제대로의 질서가 있다. 그리고 이네들의 얼굴엔 얼마나 여유가 있고 유양(悠揚)한 풍(風)이 있는가?
읽어보니 <벽공무한>에 담긴 1940년대 하얼빈의 음악회장이 그려진다. 무대에서 만나는 연주자에 대한 소묘(素描)보다, 혹은 연주자가 보여준 연주력에 대한 평보다 당시 환락의 도시였던 하얼빈의 음악회장의 풍경을 담아낸 박용구의 시선이 재미를 일으킨다.
1944년도 글이다. 지금은 2013년. 생각해보니 지금이나 음악회장의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살롱, 식당, 야외음악당, 공작, 부인, 지휘봉, 휴게시간, 팔짱을 끼고 인터미션을 즐기는 남녀들, 소파 등등. 이런 동형관계에서 오는 재미들이 내가 요새 식민지시대의 음악문화사를 공부하는 이유인 것 같다. 눈물과 민족의 회환으로 얼룩져 있을 것이라 생각되던 그 시기. 알고 보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즐길 것을 다 즐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시대가 새롭게 보인다. 지금의 모습이 당시의 모습과 너무나도 많이 닮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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