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과 종이] 영화의 모호함(21호)

2013년 7월 3일culturalaction
영화의 모호함
강신유
영화는 흔히 창문으로 비유된다. 토마스 앨새서의 ‘영화이론’에도 자세히 정리되어있듯 영화와 창은 짧고도 긴 영화사를 따라 계속해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영화가 창문이라면 관객은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창문을 통해 보는 이야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언맥퀴언의 소설 <속죄>는 작품 속 화자가 어린 시절 우연히 창밖으로 본 장면을 자기의 생각대로 곡해하는 바람에 발생한 비극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이 물리적 창문뿐 아니라 인간의 관점이라는 마음속 창문을 다루면서 그것들에 내제된 한계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어떤 창문을 통해서 대상을 바라볼 때는 멀리서 일부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창을 통해 대상을 본 관객은 자연히 불확실한 이야기와 의미속에 머물러 있게 된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은 창으로서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그만큼 작품 속에서 영화가 창문으로서 강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 주인공 제프리의 생각처럼 실제로 손월드가 자신의 부인을 살해했으며 결국 경찰에 잡혔다고 하는 해피앤딩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에 큰 무리가 없으며 히치콕 본인의 언급 또한 이를 사실시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결론 내리기를 조금 유보하고 영화 속 장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실상 이에 대한 확실한 단서는 주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끝까지 모든 것이 주인공의 착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는 원작소설에서 손월드의 범행이 확실하게 밝혀지고 결론이 나는 것과도 대비된다. 이것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영화에서는 감독 본인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모호함이 발생한다는 의미이고 다시 말하자면 이는 영화에 내제된 창문의 성질 때문이다.
필자는 한 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이창>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견하고는 다시 이를 발전시켜서 <Blow up>을 만든 것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두 영화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도 유사점을 보이는데 <Blow up>의 주인공 또한 사진작가이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현상하고 난 뒤에 자신이 찍은 몇 장의 사진 속 장면들 사이에 묘한 살인의 실마리를 포착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의 예상은 전부 오해였고 허상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Blow up>은 영화뿐 아니라 현실을 재현하는 매체 전반에 걸쳐 해당되는 리얼리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영화도 현실을 재현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역시 <Blow up>이 다루는 주제가 영화와 창문의 문제와 많은 부분 교집합을 이루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교집합이란 역시 실재와 불확실성에 관한 것이고 모호한 것이며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불확실성과 오해는 영화를 비롯한 현실을 재현하는 이미지에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불확실성의 요소를 가지고 많은 영화들을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를 바탕으로 압바스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키아로스타미야말로 지금까지 이야기한 ‘창문으로서의 영화’에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 오해들을 방법론적으로 가장 의미 있게 활용한 작가다. 그런데 얼마 전 그의 최근작 <라이크 섬원 인 러브>에 대한 논란을 기사로 읽게 되었다. 그것은 사건이 한참 고조되다가 급작스럽게 끝나버리는 마지막 장면에 대한 것이었다. <리베라시옹>은 ‘이 영화의 급작스런 결론에 이란의 거장이 말하고자 한 게 무엇이었냐’며 따져 물었다고 한다. 압바스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그것이 곧 진짜 삶을 포착해내는 가공하지 않은 진실이라 대답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 적절한 오프닝도 없고, 마찬가지로 진짜 엔딩도 없으며 우리가 화면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떠난 뒤에도 이 이야기는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로 작가 본인이 그의 영화가 삶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역시 그의 작품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은 그의 영화가 창문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리베라시옹>과 같은 반응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키아로스타미 영화를 잘못 보고 있는지 알려준다. 그 동안 저명한 평론가의 리뷰와 비평문에서도 키아로스타미 영화 속에서 완결된 이야기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들을 목격했었다. 이는 의외로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창문으로서의 영화’를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창문이라는 개념을 너무 추상적으로 영화에 접목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언맥퀴언이 <속죄>를 통해 이야기하듯 창문이라는 사물에 필연적으로 결부된 불확실성과 오해를 함께 영화로 끌어와야 한다. 그래야만 이야기로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영화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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