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민의 사회적인 것들]우리 사회의 그 이후를 물어본다. ‘헬조선’(66호)

2015년 8월 26일culturalaction
[양기민의 사회적인 것들]66호
우리 사회의 그 이후를 물어본다. ‘헬조선’
양기민
사회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 헬조선
사회를 하나의 ‘구조’로서 인식하고자할 때, ‘사회구조’란 용어는 그 사회의 신념체계와 핵심 가치들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어떤 사회가 실제로 그 신념체계나 가치들을 지향하는 여부와 상관없이 상징적인 언어로 사회는 호명되어 소비된다. 예를 들어 쿠테타를 통해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내걸은 가치는 ‘정의 사회 구현’이었다. 자신들의 존재적 특성과 괴리된 가치들을 아무렇게나 개념 규정하고, 이러한 규정과 무관하게 사회는 작동된다. 사회를 호명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특정한 사회에 어떠한 이론적 틀을 활용하여 개념화를 통해 ‘OO 사회’라고 명명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설명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의 사회를 정의하거나 개념을 규정하려고자 하는 노력은 사회를 총합으로 사고할 수 없기에 언제나 일정한 인식적인 한계를 감수해야 한다.
이와 달리 일정한 재현(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회를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방향이 때로는 사회를 오히려 명쾌하게 해석할 때가 있다. 발생하는 사건을 통해서나 문화적 생산물로서 ‘사회’를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체험을 통해서 사회를 재인식하며, 사회에 대한 의식들이 형성된다.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은 이론을 통한 학습과 성찰을 통해 대자적으로 일어나기보다는 그 자체로 ‘즉자적’이고 ‘경험적’인 실존적인 ‘인식’이다. 하나의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그 사회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시각에서가 아니라, 어쩌면 주관적이고 경험적으로 인식을 통해 사회가 어떠한 가치와 신념체계를 내재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누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통해서 사회를 읽어내는 것이 오히려 사회구조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
굳이 어려운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헬조선’이란 용어(혹은 사이트)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명확하게 인식하고 설명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를 지옥과 전근대적인 조선으로 합성한 이 감각적인 개념 규정은 현재 우리 사회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언어이자 (특히 청년층에게) 체험적 언술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몇 언론에서도 주목하였지만 헬조선 사이트(hellkorea.com)를 방문해보면, “죽창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란 선언이 인상적이다. 20대~30대 이용자들이 주로 방문하는 ‘헬조선’은 오유와 디씨 계열의 진보 코스프레 이용자와 보수적인 일베 이용자도 ‘대동단결’ 할 수 있는 화합의 장이다. 이들이 화합한 이유는 이 나라가 싫다는 ‘자국 혐오’이다.
반 사회적인 인식이 아닌 탈 조선에 대한 인식
마치 헬조선이 자국 혐오를 선동하는 듯 보이며, 죽창이라는 용어에 크게 자극되어 반(anti) 사회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죽창이란 표현은 옛 조선의 민중봉기를 희화화한 메타포일 뿐이다. 요즘 청년들의 마음이 대나무처럼 삐죽빼죽 해져 날카로워져 있고, 누군가를 찌르고 싶어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해를 할 수 있다. 어차피 이들은 짱돌을 던질 생각도 없다. 이들에 해법은 ‘탈(post)조선’이기 때문이다. 이 사이트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망가졌는지에 관한 지식 공유를 하는 유머 커뮤니티이고 어떻게 하면 탈출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이민 정보 사이트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이트의 이야기들이 쉽게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사이트는 청년들이 새롭게 ‘각성’한 주체들이 되어 사회를 반대하는 것도 냉소하는 것도 아닌 무섭도록 사회를 냉정하게 재인식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헬조선 사이트를 통해 지금 한국 사회가 얼마나 망가지고 있는지(혹은 망가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각종 통계와 사례를 올리는 게시판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살기 어려운 상황인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청년 세대의 분노가 이유 없는 감정적인 냉소가 아니라 증거에 기반 한 논리적인 사고이자 현실 인식임을 알려준다. 더 이상 청년 세대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가난에서 벗어나서 OECD에 가입한 선진국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헬조선을 하나의 전근대 신분제 사회로 묘사하며, 자신들의 신분을 피지배계층인 ‘노예’로 상정한다. 금수저와 은수저 그리고 똥수저로 나누어진 이러한 계층 의식은 이미 우리 사회가 새로운 계급 사회임을 외면하지 않는다. 헬조선의 상상도인 ‘헬조선 지옥불반도 지도’를 살펴보면 정중앙에 ‘대기업 성채’가 놓여져 있다.
대기업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는 재벌 대기업 중심으로 경제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위기의 신호일 수도 있다. 이미 막장 드라마에서 재벌과 그 가족은 단골 소재였다. 하지만 최근 롯데 기업의 권력 다툼을 보면서 이것이 드라마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뉴스 중계 방송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대기업 회장의 비리에도 불구하고 특별사면을 받는 것이 이상하지만 한국에서는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막장 드라마가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막장이었음을 드라마가 보여주었던 것이다. 최근 재벌가의 한 ‘금수저’의 막장 행동을 소재로 해서 인기를 얻고 있는 영화 베테랑에서 볼 수 있듯 대한민국의 재벌은 막장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를 넘어서 현존하는 권력임을 대중들은 이미 간파하였다.
그렇기에 스펙을 쌓고 경쟁에 이겨내어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똥수저를 가진 자들에게는 대기업 취직도 대안이 아님을 알아버렸다. 이젠 단순히 청년 일자리만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점이 문제임을 자각하였다. 선망하는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해서 헬조선에서 살아남기는 ‘노답’(답이 없음)임을 인식한 상황에서, 현실적 대안은 ‘탈조선’, 곧 이민 뿐이다. 현실 사회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식한 상황에서 어떤 정치적 개선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각자도생하는 개인주의이다. 그것도 국가의 틀을 벗어난 ‘탈조선’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하지만 이민이 모두가 선택 가능한 대안은 아니다.
헬조선, 우리 사회 ‘이후’를 묻는다.
결국 많은 노예계급들은 헬조선에서 냉소하지만 현실적인 선택지는 없다. 이들은 냉소를 통해 인식한 한국 사회의 문제점들을 받아들인다. 헬조선 사이트에 종종 보이는 ‘이 맛에 헬조선을 살지’(이맛헬)라는 말은 사회와 구조에 대한 냉소를 넘어서 마치 이러한 일들이 ‘헬조선’이라면 당연하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유머는 해학은 아니고 자조적 표현에 가깝다. 사회구조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인식한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적응을 할 수 밖에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청년 세대는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도 생각 하지 않는다. 이미 헬조선을 살면서 노력을 통해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성 세대의 여전히 반복되는 ‘청년 세대의 노력 부족’과 같은 상투적인 이야기를 비틀어 ‘노오오오력’이란 유행어를 사용한다. 아무리 노오오오력을 해도 결국 헬조선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상황적 인식에서 개인과 사회에 대안이 없음(노답)임을 선언한다.
결국 헬조선은 청년세대들이 현재 우리 사회 구조를 과거보다 더 명확하게 인식하였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들 세대의 마음(인식적 표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이를 위한 해결책이 부재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단순히 청년 세대가 냉소적으로 변했고, 저항도 하지 않고, 노력을 안 했다는 이야기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음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해결책으로 대기업을 중심으로 단순히 청년 일자리를 늘리고자하는 고용정책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해법이 될 수 없음을 알려준다. 그들이 유일한 대안으로 외치는 탈조선이란 구호를 왜 외치고 있는지에서 다시 질문을 시작하여야 한다. 결국 청년세대의 당장의 현실을 문제화해서 이러한 해법을 모색하기 보다는, 현재 우리 사회가 무엇이 문제이고, 지금의 청년들의 마음은 어떻게 상처 받았는지를 생각하며,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시 붙잡을 수 있는 사회로 구조 전환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헬조선이라는 현상은 결국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로 전환되어야 하는지, 그래서 지금 이 사회의 ‘이후의 사회’가 어떤 사회야 하는지에 관한 청년들의 질문이 응축된 절규로 봐야 할 것이다.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Prev Post Next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