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문예진흥기금 고갈 위기 시대의 딜레마(66호)

2015년 8월 26일culturalaction
[편집자주] 사회의 성장을 견인해가는 수많은 동력 중 문화예술은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과연 이 사회가 문화예술에 빚지고 있는 만큼의 재정적 지원을 예술계에 돌려주고 있는가요? 예술지원에 대한 수혜적 관점 – 불쌍한 예술계를 돕는다는 식의 –을 이제는 걷어치웠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예술계는 국가의 지원이 사라진다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원은 커녕 탄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뛰어난 예술은 탄생합니다. 세르반테스는 쾌적한 창작촌에서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아닌 척박한 감옥에 갇혀 <돈키호테>를 썼습니다. 다만 개별적 미학으로서의 예술이 아닌 사회적 자산으로서의 예술의 공공성을 지키고 싶다면 국가는 과감하게 예술지원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과 시민사회를 포괄하는, 예술의 감성과 창조력에 빚지고 있는 모든 공공영역은 예술에 대한 빚갚음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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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66호
문예진흥기금 고갈 위기 시대의 딜레마  
염신규 /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문예진흥기금이 고갈 위기라고 한다. 그런데 ‘위기’란 표현에서 긴박감을 느끼기에는 뭔가 어색한 면이 있다. 예술계에서도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지만 딱히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기도 어렵다. 기금 수혜의 대상이었던 몇몇 단체들 이외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인 것인데 이는 문예진흥기금에서 예술창작에 대한 지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속적으로 줄어왔던 탓이 크다. 게다가 수년 째 문예진흥기금 위기라는 표현을 거듭 써온 탓에 그 자체가 만성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상 수년 째 문예진흥기금이 고갈이 임박해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기정사실이었다. 기금의 수혜자인 예술계도, 기금의 관리 운용 주체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도, 관련된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도 이 자명한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기금 고갈은 적립이 중단되었던 시점부터 예정된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저금리가 만성화된 시기에, 일반적인 방식의 자산운용을 통해 기금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정부는 국고 투여를 통해 기금 고갈의 문제를 해결하겠단 입장인 듯 하다. 또한 지역예술계의 심각한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재정부처가 앞장서서 진행하던 문예진흥기금에서 지원해온 지역협력형사업의 지역발전특별회계로의 전환도 일단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문화예술계의 유일한 공공재원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을 막겠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지역협력형 사업을 지특회계로 돌리는 방식의, 예술 지원사업의 전문성과 자율성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에 근거한 발상이 일단 중단된 것도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기금을 둘러싼 진짜 고민이 단지 재원이 고갈되고 있다는 것이 전부일까? 문진기금이 유일한 공공예술지원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가?
피상적인 지적이지만 앞서 얘기했듯 갈수록 예술계가 문진기금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있는 것은 기금 수혜에 대한 예술계의 체감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실제로 예술 창작자가 아닌 수혜자에 대한 지원으로 사용 용도가 한정된 복권기금이 편입되면서 문진기금 사업이 과거의 예술창작자 중심에서 수혜자 대상 사업이 큰 폭으로 늘어났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수혜자의 확대를 통해 잠재적 예술시장을 성장시키고 예술소비의 확대를 통해 창작자에게도 예술생태계에 기반한 지원효과를 노리겠다는 게 지난 수년간의 문화부와 예술위의 입장이었다. 창작지원에서 있어서도 개별 창작에 대한 지원보다는 인프라 투자를 통해 투자 대비 지원 대상을 넓게 가져가겠다는 입장도 거듭 발표했었다.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출범하며 구상했던 예술지원의 프레임은 인프라와 예술생태계에 대한 전반적 지원의 주무부처인 문화부가 가져가고 예술위원회는 문진기금의 운용을 책임지는 동시에 개별 예술가와 예술단체 지원에 집중하겠다는 그림이었다. 한마디로 예술지원의 전반적 큰 그림과 시스템을 정부가 짜고 관리하면서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예술위에서 그 큰 그림 위에서 개별적 지원사업과 문진기금의 운용을 책임지며 협업하는 구조였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현재, 매우 희한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과거 문화부에서 국고 재정으로 진행하던 사업들이 복권기금 등을 통한 문진기금 확대를 빌미로 문진기금 사업 안으로 스물스물 기어들어와 있다. 이 사업을 왜 예술위에서 해야하는지는 문화부가 결정하고 위원회에 일방적으로 통보되는 식이다. 예술위 업무 중 가장 큰 사업은 이제 예술 관람 뿐만 아니라 스포츠관람, 여행 비용에 까지 다용도로 쓰일 수 있는 문화바우처(문화누리카드) 사업이 되었다. 예술위원회가 아니라 통합문화복지위원회로 이름을 바꿔야 할 판이다. 좀 격하게 표현해서 문진기금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이라기보다 문화부가 문화예술지원이란 명목하에 이리저리 돌려쓸 수 있는 딴주머니가 되었고 예술위는 전문성있는 예술지원을 끌고가는 민간위원회가 아니라 문화부의 하청 받는 전문성있는 용역업체가 되었다면 지나치게 까칠한 입장일까?
그런데 이런 문제는 현재와 같이 정부가 재원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구조가 존속되는 한 결코 개선될 리가 없다고 본다. 자고로 돈 내놓는 쪽이 갑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 잘 바뀌기 힘들기 때문이다. 공공 예술 지원은 필연적으로 지원의 성격과 함께 검열의 성격을 내재하기 마련이다. 공공 예술지원을 먼저 경험하고 있는 국가들에서조차 “팔걸이 원칙”과 같은 명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공공의 예술지원이 자율성의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는 반증이다. 이 땅에 완벽하게 민주화된 정부, 직접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사회가 건설된다면 그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그런 완벽한 민주사회는 존재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차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재원의 출처를 다각화하는 것이다.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조성하거나 투여해서 문화예술계에 뿌리는 방식의 기금을 벗어나, 정부 뿐만 아니라 다양한 비정부영역, 예컨대 기업, 시민사회, 노동조합, 사회적협동조합 등에서 문화예술의 지원에 대한 필요와 논리를 만들고 공동의 기금으로 모아내는 방법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물론 이런 기금 성격 변화를 위해서는 기금운용주체인 예술위의 성격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예측되는 다양한 외풍으로부터 기금의 자율성을 지켜낼 수 있는 가능성은 기금관리주체의 운용능력에 달려있다. 현재의 예술위원회는 냉정하게 봤을 때 재원을 쓰는 구조이지 재원을 조성하고 운용할 수 있는 구조나 인력 구성이 아니다. 기금성격 변화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무엇보다 이 부분에 대한 심각한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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