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대 동향]이사만루, 역전만루홈런을 노리는 문화연대(67호)

2015년 9월 22일culturalaction
[문화연대 동향]67호
이사만루, 역전만루홈런을 노리는 문화연대
9월 18일(금) 저녁 6시 30분부터 서강대학교 동문회관 11층 키노빈스에서 ‘2015 문화연대 후원의 밤, 이사만루’가 열립니다. 올해 후원의 밤 행사는 조금 더 특별한데요. 문화연대가 8번째 마지막 이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주택 프로젝트를 통해 안정적인 사무공간을 확보하고, 더욱 더 힘찬 문화운동을 다짐하고 있는 문화연대 활동에 더 많은 관심(과 후원) 부탁드립니다.
이번 호 문화연대 동향은 문화연대 16년 동안 일어났던 주요 활동 50선과 7전 8기 문화연대 사무실 이전의 역사에 대한 내용으로 대체합니다.
문화연대 16년, 주요 활동 50선
1. 1999년 9월 18일, 문화연대 창립
만드느라 힘들었습니다. 창립 당시 문화연대의 이름은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였지요. 2003년 정기총회에서 ‘문화연대’(영문명 CulturalAction)로 개명했습니다.
2. 2000년 1월 1일, <월간 문화연대> 창간
2004년 8월 정간될 때까지 발행한 문화연대 신문입니다. 52호까지의 본 신문 및 창간준비호 1,2호까지 총 54회 신문이 발행되었습니다. 문화연대가 만든 유일한 오프라인 매체였습니다. 현재 디지털화 진행 중입니다.
3. 2000년 2월 19일, 시민자치문화센터 창립
시민자치, 대안문화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시민자치문화센터를 만들었습니다. 문화연대 창립 초기부터 존재했던 기구입니다. 시민문화감리, 지역축제모니터링, 아줌마문화까페, 달리는놀이터 등 수많은 기획과 실행이 시민자치문화센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4. 2000년 3월, 청소년보호법 폐지 캠페인 발의
청소년 보호를 빌미로 표현의 자유 탄압의 도구가 되어버린 <청소년보호법>을 폐지하고, 표현의 자유 수호 및 청소년 권리 증진을 위한 대체입법을 주장했습니다.
5. 2000년 4월, 총선시민연대 Red 2000 Festival 기획
‘인디밴드 동시다발 봉기의 날’을 만들었었죠.
6. 2000년 4월, ‘용산미군기지를 생태공원으로’ 캠페인 발의
반미운동의 상징과도 같던 용산미군기지 문제에 문화연대가 뛰어들었습니다. ‘문화,시민,생태’를 주제로 용산미군기지를 탈바꿈시켜야한다는 취지였죠. 용산미군기지를 문화시민생태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구상에는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7. 2000년 6월, ‘도서관 도서구입비 증액’ 캠페인 발의
도서관 콘텐츠 확충, 도서구입비 증액, 책읽는 문화 확산 등에 대한 관심은 창립 초기부터 컸습니다. 도서구입비 증액 캠페인을 기점으로 2001년 2월에는 ‘도서관 콘텐츠 확충과 지식사회 만들기 국민운동’ 선언을 하게 됩니다.
8. 2001년, ‘천년의 문’ 건립사업 저지운동
새 천년을 맞아 한강변에 수백억을 들여 만들겠다던 정부의 ‘천년의 문’ 건립사업. 함께하는 시민행동과 함께 문화분야의 대표적 예산낭비 사례로 지적한 후, 저지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결과는? 지금 천년의 문이 존재하는지를 떠올리시면 알겠죠?
9. 2001년 3월, ‘아줌마 문화까페’ 활동 시작 / 시민문화감리단 발족
시민자치, 대안문화활동은 문화연대 활동을 중요한 축입니다. <아줌마 문화까페> 활동을 시작으로 시민문화감리단, 아파트문화공동체 활동, 지역축제모니터링, 어린이 문화체험교실, 달리는놀이터 등으로 쭈~욱 이어집니다.
10. 2001년 4월, ‘대중음악개혁을위한연대모임’ 발족 
대중음악에 대한 문화운동으로의 접근 시도였습니다. 약칭 ‘대개련’으로 불렀고요.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운동, 팬덤문화 조명 등 많은 활동을 벌였습니다. 한국대중음악상 발의 등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대중음악에 대한 문화연대 활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 2002년 7월, ‘포스트월드컵 문화사회만들기’ 캠페인 발의
월드컵 거리응원의 열기를 사회변화로 이끌어 가기 위한 문화연대의 제안이었습니다. 세종로 문화광장 만들기, 문화교육 캠페인, 시민축제 캠페인 등 3가지 제안을 담고 있습니다.
12. 2002년 10월, ‘우리는 문화대통령을 원한다’ 17대 대통령선거 문화정책공약 제안
문화연대 문화정책의 철학, 밑그림, 개입방향 등이 그려진 자료집입니다. 문화정책을 예술장르정책이 아닌 주요한 사회정책의 하나로 다뤄야 한다는 것을 총론을 통해 분명히 했습니다. 문화연대 뿐 아니라 20여 개의 문화예술단체들이 함께 만든,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자료집입니다.
13. 2002년 12월, 문화연대 문화교육위원회 발족
포스트월드컵 문화사회 만들기 캠페인 선언 이후, ‘문화교육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문화교육운동의 긴 여정이 시작된 시점입니다.
14. 2003년, 라이브공연활성화 캠페인 All That Live 1,2
문화연대 콘서트 기획의 시작입니다. ‘모던락이 들려주는 4가지 라이브이야기(3월, 연세대)’, ‘열혈가여, 반란과 열정(7월, 어린이대공원)’, 제주 섬머소닉 록페스티벌(8월 제주도) 등 3차례 열렸습니다.
15. 2003년 4월, 문화연대 문화사회연구소 개소식
새로운 문화연구의 흐름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젊은 문화연구자들의 마음의 고향이고 싶습니다. 문화사회연구소의 문은 늘 열려있습니다. www.kccs.or.kr
16. 2004년 3월,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개최
지금은 완전히 자리잡은 한국대중음악상. 문화연대가 대중음악상의 기획에 함께했습니다.
17. 2004년 5월, 서울의 문화적 재구성을 위한 캠페인 ‘A/S Festival’ 개최
MB와의 악연은 서울시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anti-Seoul 그리고 말 그대로 서울이 A/S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만든 MB식의 서울시 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축제였습니다.
18. 2005년 2월, <달리는 놀이터>, <나눔의 영화관> 시작
1년에 20차례가 넘게 지역을 돌아다녔습니다. 문화소외지역을 다니며 영화를 상영하고, 주민들과 함께 문화예술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거대한 에어스크린과 윙카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19. 2005년 3월, 대마 관련법 위헌법률심판제정신청지지 및 대마 비범죄화 요구 선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문화연대 활동입니다. 문신합법화/대마비범죄화는 문화연대가 벌였던 활동 중 가장 ‘쎘던’ 활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활동가 5인은 자발적으로 문신을 했고, 지금은 ‘난방투사’가 된 배우 김부선 씨와는 대마 관련법 위헌소송 지지로 인연이 생겼습니다.
20. 2005년 4월, ‘체육기구의 합리적 개편을 위한 토론회’ 개최
‘체육’은 문화연대 활동영역에서 늘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하지만 대중운동의 차원으로는 그러지 못했죠. 체육정책, 선수인권, 체육기구, 메가스포츠이벤트 등 체육 관련한 다양한 이슈에 대한 활동을 기획, 전개했습니다.
21. 2005년 11월, 담장없는 국회만들기 토론회
참 아까운 기획 중의 하나입니다. 권위, 권력, 특권의 상징인 국회의 담장을 없애고 열린 공간으로 만들자는 제안. 기성정당, 정치인들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더군요.
22. 2006년 1월, 한양주택 뉴타운 개발반대 기자회견, 결의대회
은평뉴타운과 함께 사라져버린 한양주택을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단독주택단지인 한양주택이 보존이 아닌 철거의 길을 걸어간 것은 뉴타운 개발주의의 득세를 상징합니다.
23. 2006년 3월, 한미FTA 저지 시청각미디어분야 공동대책위원회, 문화예술공대위 출범
문화연대가 한미FTA 저지 투쟁의 최전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나요? 한미FTA 저지 투쟁에 문화연대와 문화예술운동, 시민사회운동의 역량을 모아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맘때였나요? 문화연대가 ‘시민단체 관계망 분석’에서 가장 중심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24. 2006년 4월, 국립공원 입장료와 문화재관람료 분리징수 요구 속리산 등반
실제 관람하지 않는 문화재에 대한 관람료를 국립공원 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립공원입장료에 붙여서 징수하던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였습니다. 결국 분리징수로 결정이 되었죠.
25. 2006년 7월, ‘2006 독일월드컵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 토론회 개최
2002년 월드컵 때 거리응원의 열기를 사회변화로 끌어가고자 ‘포스트월드컵 문화사회 만들기’ 캠페인을 제기하였다면, 2006년 월드컵 때는 자발성이 사라진, 제도화되는 거리응원의 태풍 속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진행하였습니다.
26. 2007년 1월, ‘목동 예술인회관 건립재개 규탄, 문화부의 예술인회관 건립사업 전면 재검토 촉구 기자회견’ 개최
예총에 대한 대책없는 특혜사업이자 문화행정의 역사에 길이남을 무능행정의 사례입니다. 수백억의 국고낭비가 드러나고 부정과 비리가 폭로되고, 또 사법부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27. 2007년 3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미FTA 반대행동’, 한미FTA반대 봉투행동단 예술행동 전개
한미FTA 저지 투쟁은 2007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28. ‘동대문운동장 철거,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 개최
동대문운동장 철거 시도에 맞서 체육단체, 노점단체들과 함께 연대를 시작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역사’를 내어주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고척돔구장?
29. 2007년 4월, ‘지역사회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 <민중의 집> 설립운동을 제안하며’ 포럼 개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주체를 형성하고 비자본주의적인 생활양식을 확산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바로 ‘민중의 집’입니다. 이탈리아, 스웨덴 등지에서 성행하던 ‘민중의 집’ 모델을 적극 수용하면서 시작되었죠.
30. 2007년 4월, ‘낯설지만 정당한,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바라보는 3개의 목소리’ 발표회 개최
대규모 재정적자와 대책없는 사후활용방안 등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평창동계올림픽. 문화연대는 처음 유치단계에서부터 이런 문제점들을 꾸준히 지적해왔습니다.
31. 2008년 3월, ‘유인촌 문화부 장관과 새정부 문화정책을 검증한다’ 토론회 개최
MB와의 악연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됩니다. ‘검증할만한 문화정책이 존재하지 않았던’ 대표 MB맨 유인촌 장관 시절의 문화부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32. 2008년 5월, 체육문화위원회 월례포럼 ‘현대유니콘스의 퇴장과 우리히어로즈의 등장을 통해 본 한국프로야구’
문화연대 체육문화위원회, 참 다양한 주제에 대한 토론회를 했습니다.
33. 2008년 6월, 힘내자 촛불아 – 1박2일 콘서트 개최
우리 식탁을 위협하는 한미FTA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시청앞 광장에서 음악인들과 함께 촛불집회에 나온 시민들에게 힘을 주는 콘서트를 진행했습니다.
34. 2008년 9월, [시각문화교육 관점에서 쓴 미술교과서] 출간
몇 년간의 토론 끝에 나론 새로운 미술교과서입니다. 문화연대 문화교육운동의 중요한 결실이구요.
35. 2008년 10월, 기타노동자에게 삶의 노래를 : 콜트콜텍 위장폐업철회 및 노동권 쟁취를 위한 문화제 개최 / 2008년 12월,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1주일간의 헌정콘서트 개최
콜트콜텍 노동자들과의 인연이 어느덧 3000일을 넘겼습니다. 2008년 10월 시작한 수요문화제는 매월 마지막 수요일 ‘클럽 빵’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화연대는 콜트콜텍 형님들의 투쟁에 끝까지 함께합니다.
36. 2009년 1월,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관련 문화예술인 선언 및 추모 문화행사 개최 / 2009년 4월, 용산참사 유가족돕기콘서트 Live Aid ‘희망’ 개최
용산참사의 무게감 앞에 자유로운 사람이 있었을까요? 문화연대도 용산참사 관련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무분별한 개발주의 정책에 반대하고, 상처받은 유가족에게 힘을 실어준 콘서트였죠.
37. 2009년 8월, ‘동방신기’ 사태를 통해 본 연예매니지먼트 시스템의 문제와 대안 모색 토론회 개최
문화연대는 대중음악시장, 연예매니지먼트 시스템 등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방신기와 JYJ. 거대 기획사와 노예계약/표준계약. 문화연대는 보다 더 합리적인 연예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38. 2010년 5월, 외규장각 약탈문화재 완전 반환을 위한 프랑스대사관 앞 1인 시위 / 외규장각 도서 및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Live Aid 콘서트 개최
문화연대가 프랑스정부와 소송전을?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에서 약탈당한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문화연대는 프랑스정부와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비록 완전반환에는 실패했지만 소송과정에서 약탈문화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확산시켰습니다.
39. 2011년 2월, 청소년 게임이용 규제 ‘셧다운제도’ 비판과 청소년의 문화권리 토론회
정책적 실효성도 없는 강제적 게임셧다운제 도입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분명히 했습니다. 게임의 사회적, 문화적 가치는 외면한 채 ‘중독물질’인양 여기는 일부 정부부처와 정치권의 규제 시도에 대해 문화연대는 청소년단체 등과 연대하여 문제점을 제기하였습니다.
40. 2011년 6월,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버스’ 시작, 참여
희망버스의 시작에 문화연대가 함께 했습니다. 사회적 약자,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문화연대가 되겠습니다.
41. 2012년 6월, 생태적 문화귀촌 <우물터 아카데미> 시작
‘문화귀촌’이라는 이주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네트워킹하기 위한 강좌를 열었습니다. 문화적, 생태적 삶을 직접 실천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문화연대 활동이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42. 2012년 12월, ‘청년의 소셜네트워크, 청년운동의 좌표들’ 포럼 및 네트워크 파티 개최
‘청년’이라는 화두는 문화연대가 늘 관심을 두는 주제이자 주체입니다. ‘7포세대’로까지 얘기하는 오늘날 청년의 문제를 청년의 소셜네트워크와 청년운동으로 풀어보자는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43. 2013년 9월, 김조광수 김승환의 동성결혼 ‘당연한 결혼식’ 기획, 주관
특별하지만 당연한 결혼식. 문화연대가 기획하고 참여했습니다. 김승환 김조광수 커플의 행복한 삶을 늘 바랍니다.
44. 2013년 11월, 게임 및 문화콘텐츠 규제 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발족
게임을 포함한 문화콘텐츠에 대한 무분별한 규제와 탄압에 맞서 공대위를 발족시켰습니다. 음악, 만화, 웹툰, 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합리한 규제정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게임을 4대 중독물질로 규정하는 ‘게임중독법’ 제정 문제는 공대위 차원의 끈질긴 노력 끝에 제정이 무산될 상황에 놓였습니다.
45. 2014년 2월, 북한사회문화 연속강좌 시작
통일을 준비하는 문화연대의 자세. 북한의 사회문화에 대해 북한학연구자, 탈북연구자 등과 함께 대중강좌를 기획했습니다. 종편을 통해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북한사회의 실상에 대해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연속강좌는 시즌2까지 진행했구요, 문화연대 차원에서 보다 집중적인 활동을 위한 체계를 갖출 생각입니다.
46. 2014년 4월, 대한항공 송현동 호텔건립 반대 기자회견 개최
청와대와 대한항공, 참 끈질깁니다. 어떻게든 송현동 부지를 개발하겠다는군요. 문화연대는 송현동 호텔건립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경복궁 옆, 학교 옆 부지에 호텔이라니요. 공공적, 문화적 인프라가 될 수 있는 시설건립이 필요합니다.
47. 2014년 6월, 행동하는 기억 4.16 시작
세월호 참사를 행동으로 기억하려는 노력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16분. 시청앞 광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노란 종이배를 접으며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했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문화연대의 다짐은 ‘스튜디오 4.16’, ‘스테이지 4.16’ 등의 활동으로 이어집니다.
48. 2015년 3월, 평창동계올림픽 분산개최를 촉구하는 시민모임 발족
강원도의 재정파탄, 사후활용방안 없이 지어지는 경기장들을 보며 분산개최만이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이라 생각했습니다. 녹색연합, 스포츠문화연구소, 체육시민연대 등 단체들과 함께 가리왕산 답사, 대안정책보고서 발간, 기자회견, 토론회 등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49. 2015년 5월, 비판과 대안을 위한 포럼L 시작
늘 문화연대를 든든하게 받쳐주셨던 강내희 전 공동대표와 함께 새로운 좌파담론 형성, 문화연구자-사회학자-인문학자들 간의 교류 등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50. 2015년 6월, ‘최근의 표절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 포럼 개최 / 2015년 7월, ‘신경숙 표절사태와 한국문학의 미래’ 포럼 개최
메르스 여파도 신경숙 작가 표절사태에 대한 문화연대의 긴급토론의 열기를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문화연대의 문제제기가 대형출판사 중심의 문단권력을 개혁하는데 일조하기를 바랍니다.
7전 8기, 역전만루홈런을 꿈꾸는 문화연대 사무실 이사의 역사
남산 ~ 압구정 ~ 화동 ~ 아현동 ~ 서대문 ~ 운니동 ~ 공덕동 ~ 연남동 ~ 그리고 성산동
1999년 9월 ~  남산, 영화인회의 사무실에 더부살이 시작
 
2000년 4월 ~  압구정, 영화인회의 사무실 따라 이사
더부살이 시절. 고마움과 서러움이 공존하던 추억의 초창기. 이동연, 이원재 두 상근자의 추억이 듬뿍
담겨있는 시절.
2000년 9월 ~  종로구 화동 한옥집으로 사무실 이전
첫 독립사무공간을 마련. 정독도서관과 아트선재를 코앞에 둔 역사어린 동네의 작은 한옥집. 큰 회의는 지금은 없어진 느티나무까페에 내려가서 함. 겨울이면 손이 얼어 키보드를 누를 수 없었던. 하지만 옛 동네의 정취와 한옥의 매력이 공존하던 공간.
2002년 8월 ~  마포구 아현동으로 사무실 이사
1년간 잠시 머물렀던 공간. 나름 교통의 요지이고 대로변에 위치. 추억을 쌓기엔 짧게 머물렀던 사무실.
2003년 3월 ~  서대문으로 사무실 이전
레알 교통의 요지. 삼겹살집 2층의 사무실. 한 평도 안되는 흡연실에 모여 담배피우던 추억. 매주 월요일 07:00 집행위회의가 열리던 기억이 있는 곳.
2005년 11월 ~  운니동으로 사무실 이전
다시 한옥으로. 돌이켜보면 가장 근사했던(?) 사무실. 그래서 임대료가 가장 비쌌던 곳. 25명에 육박했던 상근활동가들이 함께 생활하던 공간. 시민사회운동 연계망 분석에서 1등을 할만큼 치열하게 사회운동과의 연대활동을 전개했던 기억.
2007년 11월 ~  공덕동으로 이사
처음으로 ‘간판’을 달았던 사무실(하늬야 고마워~). 간판 때문인지 몰라도 가장 오랬동안 머물렀음. 공간에 비해 저렴한 임대료. 사무공간 외 강의실공간, 창고 등으로 구성. 아래 위층으로 봉제공장과 신발공장이 있던 작은 빌딩. 탁구대의 추억.
2013년 11월 ~  연남동으로 사무실 이사
젊음의 거리 홍대 근처로 오다. 작은 빌딩건물의 2,3층에 자리잡음. 가정집같은 분위기. 수요식당, 옥상텃밭, 그리고 천장을 시끄럽게 하던 쥐떼의 기억. 젠트리피케이션의 두려움, 더 이상 밀려나가다는 북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떨다 공동주택 프로젝트를 시작.
2016년 5월 ~  문화연대 공동주택 프로젝트 입주!(예정)
대지 65평. 지하1층 지상5층의 공동주택을 일상예술창작센터와 함께 만드는 중. 문화연대 사무실은 2층. 지하에 공동강의실 겸 커뮤니티키친, 공방 등 공용공간과 지상4층 공용테라스 있음. 지상 4층에 위치한 최준영 사무처장네 집에서 ‘취사, 취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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